"신과 함께 새해를 맞다"…제주의 독특한 세시풍속

Heritage / 변지철 / 2025-01-25 08: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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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8천 신들의 나라' 신구간·신과세제 설 전후해 펼쳐져
"마을제로 마을 결속 다지고 공동체의식 키워…화해의 장"
▲ 제주 한라산 설경과 노루 [연합뉴스 자료사진]

▲ 과거 제주의 신구간 이사 모습 (제주=연합뉴스) 1950∼1960년대 제주 전래 이사철인 '신구간' 모습. 사진은 '20세기 제주시'에서 발췌. [제주시 제공=연합뉴스] 2017.1.22. bjc@yna.co.kr

▲ 제주 전래 이사철 '신구간' 시작 [연합뉴스 자료사진]

▲ 제주 송당리 본향당 '신과세제' (제주=연합뉴스) 지난 2020년 2월 6일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본향당에서 '신과세제'(新過歲祭)가 열리고 있다. 신과세제는 마을주민들이 새해를 맞아 마을의 수호신인 본향당신에게 문안을 드리고 한 해의 무사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공동체 제의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제주 와흘 마을제…무사안녕 기원 [연합뉴스 자료사진]

"신과 함께 새해를 맞다"…제주의 독특한 세시풍속

'1만8천 신들의 나라' 신구간·신과세제 설 전후해 펼쳐져

"마을제로 마을 결속 다지고 공동체의식 키워…화해의 장"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음력으로 한 해의 첫째 달을 정월(正月), 정월의 초하룻날인 음력 1월 1일을 '설'이라 일컫는다.

새로운 해가 시작하는 '설'을 전후해 제주에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세시풍속이 남아있다.

제주의 세시풍속은 '섬'이라는 자연환경과 함께 제주 섬 곳곳에서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한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신(神)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독특한 세시풍속은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 "신들이 자리비운 사이 몰래 이사한다"

제주에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이색 이사철인 '신구간'(新舊間)이 있다.

24절기의 하나인 대한(大寒) 이후 5일째부터 입춘(立春) 전 3일까지로, 올해는 1월 25일부터 31일까지다.

제주에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수많은 토속신이 있다.

그 수가 1만8천에 이를 정도로 많아 제주를 '신들의 고향' 또는 '신들의 나라'라고 부르곤 한다.

두 눈 부릅뜨고 대문을 지키는 '문전신', 복을 불러오지는 않지만 잘 달래야 집안이 편안한 화장실 속 '측간신', 부엌의 '조왕할망', 집의 출입구를 지키는 정주목신(정낭신)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이 집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는다.

생명의 신인 '삼승할망', 사랑과 농경의 신 '자청비', 바다와 바람의 여신인 '영등할망' 등 많은 사람이 믿고 따르는 유명한 신들도 있다.

이처럼 산과 바다, 마을, 가정 등 제주 곳곳에서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들이 임무교대를 위해 잠시 하늘로 올라가는 기간이 바로 신구간이다.

제주에서는 예로부터 토속 신들이 임무교대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이 기간에 이사를 하거나 그동안 미뤄뒀던 집수리, 이장 등을 하면 궂은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신구간 풍속을 제주의 기후 환경적 특성과 연관지어 해석한 연구결과는 흥미롭다.

윤용택 제주대 교수는 '제주도 신구간 풍속에 대한 기후 환경적 이해' 논문에서 고온다습한 제주의 기후 특성상 신구간의 일평균 기온이 4.7도로 일년 중 가장 추워 질병 감염 위험이 적고 제주도의 유일한 농한기이기 때문에 "신구간은 변소개축, 집수리, 이사, 이장 등을 하기에 안성맞춤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자연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 제주 선인들이 신화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삶의 지혜가 바로 '신구간'이다.

이 신구간에는 다소 신기한 풍경이 연출된다.

짧은 기간 이사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제주의 이삿짐센터나 개인 용달차 예약이 꽉 차는 등 관련 업계가 특수를 누린다.

또한 평상시 요금보다 2∼3배나 비싼 웃돈을 요구하는 '바가지'가 기승을 부리기도 하고, 가구나 가전제품을 바꾸는 가정이 많아 대리점마다 신구간을 겨냥한 할인판매 경쟁도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세시풍속에 구애받지 않는 젊은 세대가 늘어가면서 이제 신구간 특수는 옛말이 됐다.

제주시에서 주택 임대업을 하는 김모(83)씨는 "신구간을 앞두고 무가지에 주택 임대 광고를 내면 하루에 수십통의 전화가 올 정도로 휴대전화가 불이 났다. 그런데 이제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줄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 신과의 특별한 만남 '신과세제'

제주에는 정월이 되면 마을 곳곳에 있는 신당(神堂)을 중심으로 신과의 특별한 만남이 이뤄진다.

예를 들어 제주 신당의 원조 격인 송당 마을에선 매년 정월 13일(음력 1월 13일)에 신과세제(神過歲製)라는 마을제를 연다.

신과세제는 새해를 맞아 마을을 지키는 신께 감사의 세배를 올리고 마을의 무사안녕과 풍요, 가정의 행운을 기원하는 당굿이다.

송당리 신과세제에는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주민과 학자, 예술인, 관광객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관심 속에 진행된다.

올해는 오는 2월 13일 열릴 예정이다.

이날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은 당굿을 하면서 마을이 생겨난 유래를 담은 송당본풀이를 노래한다.

제주에선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를 본풀이라 일컫는다.

굿에서 본풀이를 읊어 신을 칭송하고 신을 기쁘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신에게 기원하고 신들이 도와주길 바란다.

비단 송당에서뿐만 아니라 제주 수많은 마을에서 새해를 맞아 이 같은 당굿이 펼쳐진다.

국내에서도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부분 사라졌거나 변형된 형태로 일부 남아 있을 뿐이지만 제주에선 여전히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결국엔 주민들이 마을의 뿌리를 공유하고, 공동체의 무사안녕을 함께 비는 소박한 믿음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제주의 민속학자 문무병 박사에 따르면 제주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본향'(本鄕)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몸에서 나와 탯줄을 태워 묻은 땅이자 뿌리를 내린 땅'이란 뜻이다.

제주의 마을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본향신'(本鄕神)이 있고, 신을 모신 신당인 '본향당'(本鄕堂)이 있다.

신이 마을과 각 가정을 지켜주는 건 물론 농사와 해상 안전, 치병(治病), 산육(産育) 등을 관장한다고 믿는 본향당 신앙은 마을을 중심으로 전승된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제주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 형성된 마을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시인이자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여성 1호 학예사로 활동했던 김순이 제주문학관 명예관장은 자신의 저서 '그리운 제주풍경 100선'에서 "(마을제는) 마을의 결속을 다지고 애로사항을 함께 고민하는 공동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당굿을 지내기에 앞서 불목(不睦, 사이가 좋지 않음)해 지내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앉혀 화해와 용서를 유도해 기어코 성사시켰다. 이것은 마을 지도자의 주요한 덕목이었다"고 강조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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