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가 걸었을' 숲길 산책
 |
| ▲ 도산서원과 매화[사진/정동헌 기자] |
 |
| ▲ 도산서원에서 퇴계종택으로 이어지는 퇴계 예던길 2코스[사진/정동헌 기자] |
 |
| ▲ 한서암, 계상서당, 계당[사진/정동헌 기자] |
 |
| ▲ 퇴계종택[사진/정동헌 기자] |
 |
| ▲ 월천서당 인근 낙동강변에 활짝 핀 산수유[사진/정동헌 기자] |
 |
| ▲ 매화꽃 사이로 보이는 도산서당 현판. 퇴계 친필이다.[사진/정동헌 기자] |
 |
| ▲ 낙동강을 사이에 둔 도산서원과 시사단[사진/정동헌 기자] |
 |
| ▲ 퇴계 묘비.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짧은 비명이 씌여 있다.[사진/정동헌 기자] |
 |
| ▲ 도산서원 마당에 서 있는 왕버들[사진/정동헌 기자] |
[걷고 싶은 길] 조선 최고의 학자를 찾아서…퇴계 예던길
'퇴계가 걸었을' 숲길 산책
(안동=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도산서당 마당에는 눈부시게 하얀 매화가 그윽한 향을 내며 만발해 있었다.
퇴계 이황이 후학을 직접 가르쳤던 서당에 핀, 그가 그토록 흠모했던 매화이니 '도산매'라 불러도 될성싶다.
퇴계는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 부르며 인격체로 대우할 만큼 아꼈다.
자신이 쓴 매화 시 91수를 묶어 '매화시첩'을 남겼다. 그는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매화를 선비 정신의 표상이라 여겼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유언은 '저 매화 화분에 물 주거라'였다. 마지막 순간에도 평생의 벗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 안동호 절경을 끼고 걷는 성찰의 길…'퇴계 예던길'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자처하는 안동에는 퇴계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도보여행 길이 있다.
퇴계가 옛적에 걷던 길이라는 의미의 '퇴계 예던길'이다.
모두 9개 코스인 예던길 중 제2코스 도산서원 길은 특히 그의 자취가 뚜렷하다.
그가 세웠던 서당과 그를 기리는 서원이 이 경로에 보존돼 있고, 퇴계종택과 그가 살던 집, 생가와 묘소가 이 코스에서 멀지 않다.
예던길 2코스는 월천서당∼안동호반자연휴양림∼분천리마을회관∼도산서원∼퇴계종택으로 이어진다.
거리는 11km 이상으로 꽤 멀고, 보통 걸음으로 4∼5시간 걸린다.
도산서원만 살펴보는 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갈 길이 바쁜 여행자라면 2코스를 완보하지 않고 도산서원에서 퇴계종택까지 약 2㎞의 임도만 걸어도 퇴계가 다녔던 길을 되밟는 듯한 감회에 젖을 듯하다.
예던길 2코스의 종착지인 종택에 이르면, 개울 건너편에 퇴계가 거주했던 한서암이 보인다.
퇴계는 한서암과 도산서당을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퇴계는 현재 임도로 변한 이 숲길을 약 450년 전 실제로 지나다녔을 것 같다. 이 길은 한서암에서 도산서당에 이르는 최단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임도는 보행자들이 걷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잘 다듬어져 있었다.
도산서당이 지어지기 전,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작은 서당인 계상서당, 학생들의 기숙 공간인 계재가 한서암 좌우에 있다.
23세의 율곡 이이가 58세의 퇴계를 찾아와 3일 동안 머물며 학문과 진리를 논했던 장소가 계상서당이다.
서른 다섯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당대 성리학의 핵심 쟁점이었던 이기론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 사상사의 중요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한서암, 계상서당 등은 자연 소실됐다가 현대에 재현됐다.
퇴계종택 옆에는 특이한 맨발 걷기 길이 조성돼 있었다.
이 길에는 황토가 아니라 레드 일라이트(적운모)라는 천연 적색 광물이 깔려 있었다. 레드 일라이트는 유기물과 미네랄이 풍부하고 다량의 원적외선과 음이온을 방출해 체내 노폐물과 독소를 배출하는 것으로 연구돼 있다.
어려서부터 공부에 진력하느라 몸이 약했던 퇴계는 중국 건강서인 '활인심방'(活人心方)을 필사해 옆에 두고 그 내용을 실천하는 등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리는 건강 관리법을 생활해 70세까지 장수했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더 바쁘고 고단한 현대인들에게 퇴계는 "건강의 출발점은 마음 수양, 즉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것이요"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2코스의 시작점은 안동호 옆 월천서당이다. 퇴계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와 함께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월천 조목이 세웠다.
'月川書堂'(월천서당) 현판은 퇴계 친필이다.
2코스는 월천서당에서 낙동강 변 전망대까지 약 400m 더 이어져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노란 산수유꽃들은 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있었다.
◇ 퇴계의 손때 묻은 도산서당을 품은 도산서원
조선 시대 서원은 큰 유학자인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유림과 제자들이 그를 기려 건립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결과 서원이 배향하는 유학자가 그 서원에서 제자를 실제로 가르친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나 도산서원은 퇴계가 약 10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인 도산서당을 품고 있다.
퇴계의 제자들이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조성한 결과다.
퇴계가 1561년 도산서당을 완공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만인 1574년 제자들이 도산서원을 세운 뒤 이곳은 한 번도 화마를 입은 적 없다.
수백 년 전 마당 너머 멀리 펼쳐진 태백산맥과 낙동강을 위안 삼아 학문에 열중했을 퇴계와 그 제자들을 서당 마루인 암서헌에 걸터앉아 떠올려본다.
도산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이란 임금이 이름을 지어주고 현판을 내려주는 것을 말한다.
도산서원은 선조 임금으로부터 한석봉이 쓴 '陶山書院'(도산서원)' 편액을 받았다.
사액서원이 되면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지급받고 납세·군역 의무가 면제되며 국가가 제작한 서적을 지원받아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도산서원을 마주한 지점에는 시사단이 있었다.
정조 때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 시험을 본 장소이다.
퇴계를 흠모한 정조는 도산서원의 위상과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한양에서만 치르던 과거를 이례적으로 이곳에서 실시했다. 당시 7천여명이 응시했고 정조가 직접 11명의 합격자를 선발했다.
도산서원의 여러 건물 중 도산서당, 기숙사 격이었던 농운정사, 서원의 중심인 전교당, 퇴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상덕사 등 4곳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도산서원은 2019년 소수서원, 병산서원 등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 현대에도 끊임없이 소환되는 영원한 화두 '퇴계'
도산서원에서는 마침 향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향사는 서원이 모시고 있는 선현을 기리는 행사로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열린다.
향사 때 불릴 예정인지 도산십이곡 악보가 행사 준비물 속에 포함돼 있었다.
도산십이곡은 후학이 학문에 정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퇴계가 지은 연시조이다.
고인도 날 못 보고 / 나도 고인 못 뵈 / 고인을 못 봐도 / 녀던 길 앞에 있네 / 녀던 길 앞에 있거든 / 아니 가고 어쩔꼬. 12곡 중 9곡으로, 앞서간 성현의 가르침을 기필코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퇴계는 조선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그의 학문은 중국, 일본에까지 국제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내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다.
그가 길러낸 제자는 정승급 인물이 10여명, 판서·참판 급 인물이 3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출세를 마다하고 지행합일의 삶을 살아 임금이 내린 이런저런 벼슬을 70여 차례 사양했다.
환갑을 바라보던 당대 석학 퇴계가 30대 초반의 고봉 기대승과 8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벌인 '사단칠정' 논쟁은 한국 유학사의 주요 학문적 논쟁으로 지금도 여러 측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퇴계 묘소는 예던 길 3코스에 있었다. 태백산맥 줄기인 건지산 자락에 있다.
조촐한 묘소와 묘비에 새겨진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이라는 짧은 비명에서 겸양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퇴계는 관직과 여타 존칭을 쓰지 말라며 묘비명을 직접 지었다. 퇴계 묘소 아래쪽에 며느리 봉화 금 씨의 묘소가 있었다.
아들이 사망하자 퇴계가 개가시킨 며느리이다. 금 씨는 죽어서라도 퇴계를 정성껏 모시고 싶다며 그의 묘소 가까이 자신을 묻어줄 것을 유언했다.
퇴계의 어질고 자애로운 성품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 수령 500년 왕버들과 키 큰 회양목의 건재를 빌며
예던길 2코스에는 퇴계 유적 외에도 안동호반자연휴양림, 한국문화테마파크, 경상북도산림과학박물관 등이 있었다.
지나치기보다 머물며 둘러보고 쉬고 싶은 곳들이었다.
휴양림은 건강측정실, 음파·온열·수압 치유실 등을 갖춘 종합 휴양시설이었다.
산림과학박물관은 산지가 많은 경북의 산림 사료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건립된 산림문화학습장이었다.
2코스에서 좀 떨어져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 들러 보면 한국 유학의 맥을 짚을 수 있는 사료를 접할 수 있다.
예던길에서 귀한 나무 몇 그루와 마주쳤다.
도산서원 마당의 왕버들, 도산서당 앞 회양목, 퇴계종택의 미선나무다.
왕버들은 도산서당 시절부터 있었던 듯, 퇴계가 지은 '시내 버들' 시가 나무 아래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안동댐 조성 때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원 앞 마당을 5m 가까이 성토하는 과정에서 이 나무의 줄기 대부분이 땅속에 묻혔다는 설명도 병기돼 있었다.
대개의 나무는 줄기가 흙 속에 묻히면 수피가 숨을 쉬지 못해 서서히 고사한다. 물과 친한 왕버들 뿌리는 물속에서도 숨을 쉰다.
줄기의 반 이상이 흙 속에 묻힌 왕버들의 무탈을 바라는 마음이 인다.
도산서당 앞 회양목은 키가 2m 넘게 자라 있었다.
생장 속도가 느린 회양목은 화단 울타리로 많이 심는다. 가위질에 희생되지 않고 자연 수형을 갖춘 회양목이 반가웠다.
미선나무는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자생하는 1속 1종의 희귀식물이다.
3월 말∼4월 초, 잎이 나기 전에 하얀 꽃을 먼저 피우는 관목이다. 퇴계종택 마당 귀퉁이에서 하얀 꽃을 피운 소박한 자태가 선비의 겸손을 떠올렸다.
뭇 생명이 저마다 사연을 가졌다. 외적 간섭으로 인해 위엄을 잃는 일 없이 자연 수명을 누리는 나무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 Yonhap News Agenc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