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풍에서 마을 지켜준 12만㎡ 송림…주민들도 목숨 걸고 지킨 숲
용왕에게 국태민안 비는 동해신묘…"아늑한 솔숲에서 쉼 얻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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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양 조산리와 소나무 숲 [촬영 양지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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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을 인근 소나무 숲 [촬영 양지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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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산송림 [촬영 양지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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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해신묘 [촬영 양지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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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해신묘 [촬영 양지웅] |
[굽이굽이 별천지] 주민 손으로 산을 쌓다…솔숲 우거진 양양 조산리
해풍에서 마을 지켜준 12만㎡ 송림…주민들도 목숨 걸고 지킨 숲
용왕에게 국태민안 비는 동해신묘…"아늑한 솔숲에서 쉼 얻고 가세요"
[※ 편집자 주 =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듭니다. 강원도의 산과 강, 바다와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는 반짝이는 주민들의 삶이 모여 있습니다.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소멸이라는 화두와 함께 잦아들고 있지만,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갑니다. 길과 마을에 깃든 27개의 이야기를 연합뉴스가 1년 동안 격주로 소개합니다.]
(양양=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강원 인제에서 양양으로 향하는 44번 국도가 끝나고 다시 속초로 향하는 7번 국도가 시작하는 곳에 드넓은 솔밭이 품은 마을이 있다.
그곳은 옛적 조상들이 힘을 합쳐 산을 쌓았다고 해서 조산리(造山里)라는 이름을 얻었다.
평지를 산으로 만든 사연과 드넓은 솔숲에 깃든 역사, 그리고 현재 주민들의 삶을 솔내음 가득한 바람과 함께 들여다본다.
◇ 동해로 뻗는 설악의 기운…인재 배출을 위해 산을 만들다
양양에서 속초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낙산사가 나온다. 절에 닿기 전 작고 조용한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날 옛적 금강산 쪽에서 왔다는 노승이 마을에 나타났다. 땅을 두루 살피는 승려를 본 마을 노인들이 그를 불러 무엇을 보는지 물었다.
노승은 "이 마을은 먹고 사는 데는 걱정 없겠지만 아직 훌륭한 인물이 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호기심이 동했다. 오랫동안 뛰어난 인물을 배출시키려 온갖 애를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까닭이다.
어찌하면 뜻을 이룰 수 있느냐는 주민들의 질문에 노승은 답했다.
"설악산에서 동해를 향해 뻗어 내려오던 산맥이 도중에 멈췄는데 훗날 발전을 도모하려면 마을 주위에 산을 만들어야 한다."
주민들은 이 말에 따라 1657년 합심해서 산을 만들었고 이후로 마을에 좋은 일이 생기며 훌륭한 인물도 많이 배출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유래에 따라 마을 이름도 조산(造山)이 됐다.
이 마을은 1667년에 산이 무너지면서 섬이 됐다가 1867년 큰 홍수가 나면서 매몰돼 다시 육지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를 증명하듯 마을에는 '딴섬', '속딴섬', '원두섬' 등 옛지명이 내려오고 있다.
◇ 소나무 대신 나를 베어라…목숨 걸고 지킨 조산송림
이 마을은 어미 새의 날개 품에 안긴 새끼처럼 넓은 소나무 숲에 싸여 있다.
이는 4백여년 전 입향시조인 강릉 최씨들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지형적 결함을 보완하려고 만든 방풍·방조림이다.
이들이 심은 소나무는 현재까지 보존돼 축구장(7천140㎡) 넓이의 18배와 맞먹는 12만여㎡ 규모의 숲이 됐고 '조산송림'으로 이름 붙었다.
조산송림은 대대로 신성하게 여겨지는 숲이었다. 예로부터 조산리 주민들은 숲을 지키는 일에는 목숨도 걸 정도였다.
고종 무술년 봄, 신경유라는 자가 농부훈령을 받았다 하며 소나무를 베려 하자 마을 사람들이 강경히 벌목을 반대해 관·민 사이 일대 충돌이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당시에는 미군이 인근에 주둔하며 해송을 일제히 베려 하자 마을 부녀자들이 나무를 껴안으며 거세게 반대해 포기한 사실도 있다.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나무를 지킨 것처럼 숲도 온몸으로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예로부터 영동지역은 태풍급 강풍인 '양간지풍'(襄杆之風) 또는 '양강지풍'(襄江之風)이 불어 주민들의 삶을 위협할 정도다.
하지만 조산송림은 동해로부터 불어오는 강풍은 물론 바람을 타고 오는 모래와 염분으로부터 집과 논밭을 보호한다.
해안선을 따라 빼곡한 해송림은 겹겹이 친 울타리처럼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방사림인 동시에 높은 파도에 잘게 부서져 날아오는 바닷물을 막아주는 방조림이기도 하다.
◇ 용왕에게 바친 정성…이제는 명품 힐링 장소로 변모
조산송림 남쪽 끝자락, 낙산해변 가까이에는 곧게 뻗은 해송에 둘러싸인 사당 하나가 있다.
이는 '동해신묘'로 고려 성종 10년∼현종 19년(991∼1028년) 지어졌다.
이곳은 나라에서 지내던 큰 제사인 '중사'를 지내며 동해 용왕에게 국토수호와 국태민안, 풍농·풍어를 기원했던 신묘다.
동해신묘는 서해 풍천, 남해 나주와 함께 매년 2·8월 바다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이때 임금이 친히 향과 축문을 내렸다.
현재 동해신묘에서는 새해 첫날 오전 6시 해맞이 행사의 하나로 제례를 봉행하고, 해수욕장 개장 시기인 7월에는 해변 용왕제를 지낸다.
주민들도 매년 정월 초닷새에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지낸다.
예로부터 성황제를 지낼 사람들은 열흘에서 보름 전부터 금줄을 치고 문 바깥으로 출입을 삼가며 몸가짐을 깨끗이 할 정도로 정성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해신묘는 2000년 1월 23일 강원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이처럼 솔숲과 신묘가 지켜주는 마을 조산리는 관광객들에게 명품 힐링을 제공하는 동네로 변모를 꾀하고 있다.
조산리에는 현재 450여명이 살고 있다. 주요 소득원은 농업과 상업, 관광업이다.
마을 남쪽으로 100㏊에 이르는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쌀, 보리, 옥수수, 감자 등 농산물을 풍부하게 생산한다.
주민들은 여름철이 낙산해변을 찾아온 피서객에게 농산물을 팔거나 민박을 유치해 소득을 올려 왔다.
이제는 캠핑 문화 확산에 따라 마을에서도 '조산리 솔밭 야영장'을 운영한다.
주변에 대형 콘도와 리조트, 펜션 등이 많지만 많은 피서객이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야영장을 찾는다.
많은 캠핑객이 이곳을 다녀간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후기를 올리며 만족감을 드러낼 정도다.
최종열 조산리장은 11일 "조상들이 일구고 지켜온 역사 깊은 마을을 지키고 동해신묘 명맥을 잘 이어가는 것이 숙제"라며 "특히 넓은 솔밭은 마을의 자랑이니 많은 관광객이 들러 아늑한 힐링을 얻고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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