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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부동 전투 참전 경찰관들 [경찰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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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관들에게 수여된 UN종군기장 명부 [경찰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다부동부터 장진호까지…6·25 전쟁 곳곳 참전했던 경찰
열악한 전황서 방어선 사수…미군 극찬 기록도 남아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조병옥 내무장관은 미 8군 사령관에게 한국 경찰의 유엔군 배속을 요청했다.
유엔군이 한국인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점을 노린 적이 피란민 등을 가장해 아군 지역으로 침투할 우려에 대비하고자 한 조치였다.
미군은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다 7월 영동에서 게릴라 습격을 당한 후 총 1만5천 명의 한국 경찰을 유엔군에 배속했다.
또 M1·카빈·중기관총 등 화기 7만여 정과 피복을 보급했고, 일부는 기관총 운용 등 정예훈련을 시켰다. 이들은 '화랑부대'로 불리며 합동작전 등에 참여했다.
당시 한반도 군사지도는 일제가 제작한 게 대부분이라 작전 수행에 애로가 많았는데 전국 각도에서 근무했던 한국 경찰들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
한국 경찰들의 활약이 돋보인 주요 전투들은 지금까지 회자하고 있다.
태안사 전투도 그중 하나다. 1950년 7월 24일 북한군이 여수 방면까지 내려오자 당시 한정일 곡성경찰서장은 경찰관 등 520명으로 부대를 편성, 28일 매복조를 배치한 후 북한군을 공격해 52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하는 동시에 장비 70여 점을 빼앗아 승전했다.
변변한 무기도 없던 경찰관들이 북한 정규군을 격퇴한 전과는 신문 호외를 통해 알려지는 등 전쟁 초기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함안지구 전투도 큰 성과였다. 낙동강 방어선 중 서부전선인 함안지구에 있던 국군 2개 사단이 다부동으로 이동하면서 함안 전선에는 전남·북과 경남 3개도 경찰관 6천800명과 미군 25사단 일부만이 남았다.
경찰관들은 8월 18일부터 9월 15일까지 수없이 많은 전투를 이겨내면서 북한군 4개 사단을 격퇴하고 끝내 방어선을 지켜냈다.
다부동 전투도 충혼비가 건립됐을 만큼 주요 기록으로 남았다.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은 낙동강 방어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는데, 55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할 수 있었다.
당시 불리한 전황에 정부와 군 지휘부가 부산으로 떠나면서 대구는 혼란이 가중됐는데, 경찰만은 끝까지 대구 사수를 결의하고 남아 시민을 보호했다. 이 전투에 1만5천 명의 경찰이 참전했고, 수많은 영령이 산화했다. 또 이 전투에서 북한군 2만4천 명, 한미연합군 1만 명이 사상했다.
마지막 장진호 전투는 이미 기록물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전투는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함경남도 장진 일대에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벌인 전투로, 중공군 진출을 2주일간 지연시켜 아군이 집결할 시간을 확보한 덕분에 흥남철수작전이 가능케 했다.
흥남철수작전은 미군과 한국군이 12월 흥남항에서 수송선과 지원함정 등을 이용해 10만여 명이 넘는 피란민을 구출해 38선 이남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장진호 전투에서는 미 해병 1사단에 배속됐던 화랑부대 1개 소대 기관총 부대가 뛰어난 전공을 거둬 미 해병의 극찬을 받았다.
미 해병 대대장인 로버트 태플릿은 수기 '다크호스 식스'에서 "화랑부대는 몰려드는 엄청난 수의 중공군을 향해 위압적인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고 그 기관총에 죽은 적군 수는 200명이 넘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장진호 전투 기록물인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에서도 "미 해병에 의해 훈련된, 군기가 있고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한국 전투경찰 부대"라는 표현이 나온다.
경찰청 관계자는 4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활약한 참전 경찰의 숭고한 희생과 용기를 기억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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