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은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이혁진 '관리자들'

이승우

| 2021-09-09 15:37:15


"책임은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이혁진 '관리자들'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46쪽)

2016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한 이혁진은 신작 장편소설 '관리자들'(민음사)에서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젊은 작가답지 않은 인사이트를 보여준다.

'관리자들'은 통상 기업이나 공조직에서 중간 관리자를 지칭한다. 부장, 국장 등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주 또는 경영자와 일반 사원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하나 실제 주로 하는 일은 상명하달이다. 위에서 눌리고 밑에서 치이는, 가여운 자리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최대한 책임을 피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전작들에서 회사로 상징되는 계급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욕망을 형상화해온 이혁진은 이러한 관리자들의 속성을 발가벗기듯 묘파하며 인간 본성에 자리 잡은 부조리한 민낯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소설은 중간 관리자들을 아예 '빌런'으로 묘사한다.

작가의 눈에 관리자들은 공정한 원칙과 질서보다는 자신의 이해가 중요하다. 이 관리자들은 자기 이해 관계를 위해 언제든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려고 할 뿐 아니라 책임을 떠넘긴다. 또 이들은 위계 상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조종하려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관리자들이 가장 잘하는 일은 모든 책임 소재를 슬쩍 아래로 떠넘기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소설은 이런 관리자들의 보편적 속성을 공사 현장이라는 작은 세계를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해 보여준다.

"일 잘하는 초짜들은 정말 쓸모가 있었다. 반장이라 불러 주고 인부 몇 명 달아 주면 하나같이 이순신 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일들을 했다. 신에게는 아직 다섯 명의 인부가 있사옵니다! 현장에 자기들밖에 없는 것처럼, 소장의 기대에 보답하고 더 인정받고 싶어 안달들을 했다. 소장은 그런 초짜 반장들을 정말 좋아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90쪽)

국도 옆 관 매립 공사장. 정신없이 작업 중인 무리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는 듯한 남자 선길은 결국 현장 관리자에 의해 '관심 병사'처럼 찍혀 '멧돼지 보초병'이라는 이상한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며칠 밤을 지켜도 멧돼지는 나타나지 않고, 선길 역시 사라진다. 이 와중에 사고가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평범해 보이던 공사 현장은 사회의 모든 적폐가 압축된 듯한 부조리 연극의 무대로 바뀐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과 동의어로 읽히는 '관리'는 현실을 연쇄적으로 왜곡시켜 파국을 부른다.

이혁진은 빌런에게만큼이나 무심한 동조자와 비겁한 목격자들에게도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특히 그는 회사에서 일하는 개인에게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회사는 절대 상처 입지 않고 건재하다는 사실을 소설 내내 거듭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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