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성
| 2026-03-26 20:12:29
'72시간 공연' 선보이는 카입 "오셔서 '딴짓'하셔도 좋아요"
국립극단 '창작트랙' 통해 3일간 발표회…"자유롭게 느끼고 반응하시길"
수백개 소리 반복재생하는 구조…"ASMR처럼 떠도는 소리 경험할 것"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니벨룽의 반지', 제1부! 라인의 황금!"
우렁찬 목소리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제목을 읽으며 대본 낭독을 시작한 배우는 별안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사를 속삭인다.
공연장에 자유롭게 자리 잡은 관객은 배우의 곁에 서서 그가 읽는 대본을 유심히 살펴보는가 하면, 연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들여다보거나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는 작곡가 카입이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에서 26일부터 29일까지 72시간 동안 진행하는 국립극단 창작트랙 백팔십도(180°) '극장의 다음: 다가올 낯선 감각들' 최종발표회 '파빌리온 72'의 한 장면이다.
3일 동안 멈추지 않는 실험 같은 발표회를 기획한 카입은 공연장에 펼쳐지는 예기치 못한 순간을 통해 관객이 각자의 감상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카입은 이날 공연에 앞서 기자들을 만나 "열린 분위기에서 관객이 자유롭게 무언가를 느끼고, 발견하고 반응하길 바란다"며 "거창해 보여도 사실 별것 없으니 공연장에 재밌게 머무르시고, 자연스럽게 공연장을 오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발표회는 국립극단의 공연예술 연구 개발 사업 창작트랙 백팔십도에 참여한 카입이 지난해 10월부터 180일간 이어온 창작 과정을 공유하는 자리다. 카입은 공연과 영화, 미술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23년 차 작곡가로, 영화 '공공의 적', 연극 '이 불안한 집' 등의 음악을 맡았다.
카입은 프로젝트 기간 청각적 요소는 물론 극장을 둘러싼 관습과 질서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발표회를 준비했다. 그는 과거 한 작품의 재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한 계기로 소리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카입은 "부득이하게 소리를 틀 수 없는 상황에서 리허설을 진행하게 됐는데, 소리 없이도 흥미롭게 리허설이 흘러가는 것을 경험했다"며 "그때부터 공연에 소리가 빠질 수 있을까, 소리와 공연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서로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질문하기 시작했다"고 돌아봤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수백개에 달하는 소리의 파편들이 저마다의 주기를 가지고 재생된다. 그러나 관객은 이를 이해하거나 소리 가운데에서 특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는 없다.
실제 공연에서도 '니벨룽의 반지' 대본을 읽어 내려가는 배우 3명은 속삭이거나 서로 겹치게 대사를 뱉으며 관객의 이해를 방해했다. 고양이 울음소리나 칼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배우의 목소리를 덮기도 했다.
카입은 "텍스트를 분절해서 의미가 관객에게 닿을 수 없는 구조다. 'ASMR'처럼 소리가 떠도는 인상을 유도했다"며 "많은 소리가 각자의 주기대로 무심하게 등장하며 중첩되고 사라진다. 소리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답을 가져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러닝타임을 최대한 늘려보고 싶었다는 카입은 36시간을 주기로 같은 소리와 장면이 두 차례 반복되도록 발표회를 설계했다.
카입은 "72시간은 재난 상황 속 골든타임이자, 외부와 고립된 상황에 놓인 인간의 인지 체계가 재편되는데 걸리는 시간이기도 하다"며 "늘려놓은 시간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경험하며 감각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3일간 관객들은 자유롭게 공연장을 드나들 수 있으며, 공연장에서 잠을 자거나 소리를 내도 제지당하지 않는다. 카입 역시 중간중간 잠을 자면서 현장의 소리를 녹음할 예정이라고 한다.
"관객분들이 들어왔다가 바로 나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오셔서 다른 음악을 들으셔도 됩니다. 다른 무언가를 하는 상황을 오히려 환영합니다."
실험을 진행한다는 생각으로 이번 발표회를 기획한 카입은 현장에서 녹음한 소리를 정리해 웹사이트에 공개할 계획이다. 카입은 이번 발표회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극장에 관한 생각들이 모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회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작업이 아닌 저희가 속한 현실을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72시간 동안 벌어질 일도 예측할 수 없는걸요."
카입의 발표회는 오는 29일까지 이어진다. 이번 발표회에는 관객 2천명이 관람을 신청한 상태다.
공연장에서 만난 관객 김성은(21)씨는 "공간 자체가 연습실 같은 느낌이라 같이 연습하는 느낌도 들고 현대미술을 보는 느낌도 든다"며 "내일 아침까지 머무르며 관람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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