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희
| 2026-10-06 18:56:15
(서울=연합뉴스) 조윤희 기자 = 민주주의와 여론의 취약성을 꼬집었던 140여 년 전 입센의 고전이 SNS와 실시간 미디어가 여론을 지배하는 현대 사회로 돌아와 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진실보다 프레임과 댓글이 더 막강한 힘을 가진 시대, '민중의 적'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진실과 여론의 격렬한 충돌이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서울시극단은 오는 26일부터 다음 달 14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연극 '에너미'(The Enemy)를 선보인다.
헨리크 입센의 대표작 '민중의 적'을 스코틀랜드 극작가 키어런 활리가 현대적으로 각색한 대본을 바탕으로, 강훈구 작가가 번역·윤색하고 이준우 서울시극단 단장이 연출을 맡았다.
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준우 연출은 "과거 '민중의 적'은 소수가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 지금은 SNS나 미디어로 진실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이 오히려 흐려지기도 한다"며 "각자의 목소리가 서로를 찌르는 칼이 될 수도 있고, 서로 피해자라 부르지만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분열된 사회의 한 장면을 다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작품은 대규모 리조트 개발을 둘러싼 갈등과 SNS·라이브 방송 등 디지털 매체를 통해 여론이 빠르게 형성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다룬다.
의사 스토크만 박사가 온천 도시의 수질 오염 위험성을 알리려다 지역사회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원작의 뼈대를 가져오되 현대 사회의 달라진 단면들을 대폭 반영했다.
원작의 페테르와 토마스 스토크만 형제는 시장인 언니 보니와 커스틴 스토크만 자매 구도로 바뀌었다. 환경 활동가 출신 커스틴이 지역 도시의 워터파크 리조트 개발 과정에서 수돗물이 독성 물질에 오염됐다는 사실을 폭로하려다 저항에 부딪히는 설정이다. 여론을 흔드는 매체 역시 신문 인쇄소에서 지역 대형 유튜버와 라이브 방송, SNS 댓글 등으로 변경됐다.
무대 위에서 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 역시 한층 깊어졌다.
이 연출은 "이전 작업들에 비해 스크린 수가 확연히 늘어날 것"이라며 "극 중 등장하는 유튜버의 라이브 방송과 실시간 댓글, 그리고 그 댓글과 소통하며 여론이 거세게 뒤흔들리는 양상을 무대 위에 구현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SNS에서 누군가를 타깃 삼아 공격하다가도 관심이 식으면 프레임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여론의 흐름을 화면에 채팅창으로 띄우는 등 예상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의 연출을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번역과 윤색을 맡은 강훈구 작가는 작품의 현대적 의미를 설명하며 "매일매일 어떤 사람이 하루 만에 영웅이 되었다가 다시 민중의 적으로 돌아서는 과정을 흥미로우면서도 무섭게 바라보고 있는 게 지금 우리의 마음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가 '적'으로 몰리면 발언권조차 얻지 못하고 끝나는 상황이 많지만, 입센은 적으로 몰린 커스틴에게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연설의 장을 마련해 준다"며 "주인공의 긴 독백과 연설이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라고 강조했다.
커스틴 역에는 배우 문소리와 이봉련이 더블 캐스팅돼 공공의 책임과 가족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문소리는 "많이 각색됐다고 보여질 수도 있지만 원작의 틀을 절대 벗어날 수 없고, 클래식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연습하고 있다"며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엄청난 속도감과 공포심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잘 담긴 작품으로 만들어 관객분들께 보여드렸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봉련은 "SNS 미디어 시대에 입센의 희곡이 다시 이 시대로 와서 관객과 풍요롭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28년 전 서울시극단의 '민중의 적' 원작 공연에 참여한 데 이어 이번에 커스틴의 시아버지이자 사업가 데릭 역으로 합류한 배우 강신구는 "2026년 이 시대를 봤을 때 이 작품이 오늘에 훨씬 더 어울리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끝)
[ⓒ K-VIBE.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