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희
| 2026-07-07 17:49:25
'호프' 나홍진 "비극이 왜 일어나는지 우주적 관점서 바라봤죠"
제작비 500억원대 SF…"먹구름 영화계서 내수용 미래 없다 여겨"
"서사 완성도 위해 러닝타임 156분…후속작 나오면 외계인에 집중"
(서울=연합뉴스) 박원희 기자 = 나홍진 감독이 장편 데뷔작 '추격자'(2008)와 두 번째 장편 '황해'(2010)에서 다룬 것은 악(惡)과 그로부터 초래되는 비극이었다.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 분)은 무참히 여자를 살해했고, '황해'에서 살인 청부업자 면가(김윤석)는 주저 없이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
악에 대한 나 감독의 관심은 '곡성'(2016)에서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요소로까지 나아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지인(구니무라 준)이 마을에 찾아온 이후,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폭력에 물들어가며 비극이 발생했다.
나 감독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호프'는 비극을 바라보는 관점을 우주로까지 넓혔다. 나 감독이 세상의 뉴스를 보며 느낀 불길함은 외계인을 등장시켰고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가상의 마을 호포항이 쑥대밭이 되는 이야기로 구현됐다.
"('추격자'는) 사이코패스가 무엇이고 도대체 이 사람이 왜 이러는지 시작한 영화였고 그 고민을 계속 이어가다 보니 초자연적인 지점까지 퍼스펙티브(관점)를 끌고 가게 됐습니다. '곡성'의 초자연적인 데서 더 나아가 이번에는 우주로까지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나 감독은 "저도 인간이라 밝고 아름다운 상황에 끌리지만, 작품을 선택할 때는 네거티브한(부정적인) 쪽에 시선이 간다"며 영화 제작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호프'는 호포항에 알 수 없는 존재가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SF 영화다. 호포항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마을청년 성기(조인성), 순경 성애(정호연)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미지의 존재에 맞서 싸운다. 미지의 존재가 외계인이란 점이 드러나고, 영화는 이들이 외계인과 벌이는 싸움을 고강도 액션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액션 영화로서 외계인을 무찌르는 데 집중하던 영화에는 이질적인 장면들도 있다. 범석을 비롯한 사람들이 총쏘기를 주저하는 순간이다. 이어 드러나는 사건의 전말은 다른 관점을 요구하며 관객에게 생각할 공간을 만든다.
나 감독은 "악행이 꼭 악의를 가져야지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영화와 흡사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현상을 이런 시선으로 관객들이 보시면 좋겠단 마음으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SF 장르의 블록버스터다. 제작비는 국내 제작 단일 영화로는 최대 규모인 500억원대로 알려졌다. 국내 영화 시장의 수입만으로는 제작비 회수가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다.
이는 국내 영화 산업에 관한 나 감독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그는 '곡성' 개봉 이후 2017∼2018년 '호프'를 구상할 무렵, 넷플릭스의 국내 진출, 한국 영화 제작비 상승 등 영화계에서 이는 변화의 바람을 감지했고 국내 영화계에 들이닥칠 '먹구름'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 국내 영화 산업은 그 이후 코로나19 확산으로 침체기에 빠졌고 위기감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 감독은 "내수용으로 제작해 국내 시장에서만 개봉하기엔 승산과 미래가 없다고 느꼈다"며 "국내가 아닌 데서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힘든 시절이 다가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이런 생각은 나 감독을 SF 장르로 이끌었고 그 야심의 결과물이 '호프'가 됐다. 지난달 열린 제79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호프'는 해외의 높은 관심을 받았고, 200여개 국에 선판매되며 순제작비의 절반가량을 조기 회수했다.
나홍진표 SF는 시골 마을과 외계인이란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하며 독특한 개성을 자아낸다. 의상, 총기, 건물 등은 1970∼1980년대 한국으로 짐작하게 하지만, 시대와 장소 모두 불분명하다.
나 감독은 "한국적인 요소를 결합해 한국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싶었다"며 "절묘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눈에 띄는 또 다른 지점은 외계인이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 테일러 러셀 등 할리우드 배우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는데, 이들이 모션 캡처와 페이셜 캡처로 외계인 외양을 하고 등장해 배우 본연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 감독은 후속작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호프'에 이어지는 뒷이야기도 써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 감독은 "만약에 다음 영화가 나온다면, 이들 외계인의 얘기가 중시될 수밖에 없다"며 "독립영화('호프'와 같이 할리우드 제작이 아닌 작품)에 출연하는 할리우드 배우의 개런티는 (국내 배우와)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돈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호프'의 상영 시간은 '황해', '곡성'과 같은 2시간 36분이다. 칸에서 상영했던 버전보다는 4분 줄었지만, 여전히 통상 2시간 안팎인 다른 영화들보다 긴 편이다. 특히 전작들이 나왔던 시기보다 숏폼 영상이 보편화됐다는 점에서 요즘 관객들에게 더 길게 느껴질 수 있다.
나 감독은 이에 관해 "서사의 중요성 때문"이라며 "짧게 잘 쓸 수 있는 다른 분도 계시지만, 제 입장에선 완성된 하나의 구조를 갖추고 차별화된 요소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 온전히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인간과 외계인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향하던 영화는 점점 베일을 벗으면서 복잡해진다. 결말에 이르러 영화는 또 하나의 시작을 암시하듯 불분명하게 마무리된다.
나 감독은 이에 대해 관객들이 영화를 자기 각자의 해석대로 즐겨주길 기대했다.
"제가 관객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본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텐데, 객석에 앉은 분들이 다 다른 분이란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하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관람하신 관객 여러분의 것이에요. 각자의 이해에 따라 (이야기를) 결정짓는 권한을 드리고 싶습니다."
(끝)
[ⓒ K-VIBE.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