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현
| 2026-06-07 15:31:12
연대의 힘으로 부순 절망의 벽…아리랑 없는 '발레아리랑'
발레축제 기획공연…이루다 안무가 "아리랑에 담긴 민족 정서 표현"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무용수들이 무대 안쪽 스크린에 나타난 거대한 벽의 형상 앞에 줄지어 섰다. 쓰러질 듯 몸을 흔들다가도 앞을 가로막은 벽에 저항하는 듯 이내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워 일으켰다. 서서히 벽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발레 아리랑'은 절망의 벽 앞에 멈춰 선 인간의 좌절과 끝내 다시 서로의 손을 잡고 연대해 일어서는 저항과 치유의 과정을 그렸다.
작품은 올해 대한민국발레축제 기획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최수진·이루다가 공동으로 안무를 창작했으며 음악·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무토(MUTO)가 협업했다.
제목과 달리 우리에게 익숙한 아리랑의 선율은 작품에 흐르지 않는다.
이날 공연장에서 만난 안무가 이루다는 "아리랑 선율보다는 그에 담긴 정서 자체를 가져오고자 했다"며 "나라 잃은 민족의 그리움, 아픔, 좌절과 역경 속에서도 삶을 영위해 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민족적 정서 속에서 풀어냈다"고 설명했다.
주제에 맞게 작품은 1부에선 절망이란 벽 앞에 소모되는 슬픈 현실을, 2부에선 절망을 뚫고 나아가기 위한 연대를 그려냈다.
최수진이 안무를 담당한 1부의 2인무 대목은 이러한 절망의 감정을 잘 녹여냈다. 우리나라 전통 삼베옷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은 무용수가 등장해 위태로운 안무를 선보였다. 좌절감에 쓰러지고 주저앉기도 하는 동작이 계속됐다.
그러나 안무는 개인의 절망과 좌절을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내 무대에는 또 다른 무용수가 등장해 쓰러질 듯한 파트너를 떠받쳐 주고, 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도록 도왔다. 절망에 잠식되지 않겠다는 듯 발버둥 치고 안간힘을 썼다. 두 무용수가 마주 본 채로 손을 잡고 온기를 전하는 장면에선 절망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려는 의지를 표현했다.
이루다가 안무를 구성한 2부는 이렇게 서로를 보듬은 무용수들이 함께 벽 앞에서 저항하고 끝내 균열을 일으키는 치유의 서사를 담았다.
하이라이트는 마침내 벽을 무너뜨린 무용수들이 단체로 강강술래를 연상시키는 둥근 대형의 군무를 추며 신명 나게 '한풀이'를 하는 모습이다. 이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백의민족으로 불리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등장하며, 축제를 연상시키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신명 나는 흥을 표현했다.
이루다는 "우리 민족의 한(恨)의 정서, 그리고 이러한 집단적 감정을 축제 속 폭발적인 에너지로 풀어내는 장면을 보여드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품은 무조건적인 희망과 승리의 이미지로 끝나지는 않는다.
신명 나는 강강술래 원무가 끝난 후 무용수들은 원형으로 고요히 엎드렸다. 거문고 선율이 이어지는 가운데, 붉은 옷을 입은 무용수가 이들을 일으키는 듯한 손짓을 하며 여운을 남겼다.
이루다는 "벽을 깨부순 이후에도 인간은 또 다른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 마련"이라며 "절망의 재해석, 절망 속 희망이란 주제 의식처럼 그러한 순환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힘을 잃지 않는다는 암시를 줬다"고 했다.
거문고와 태평소, 전자음악을 한데 섞은 무토의 사운드는 한국적인 선율을 살리면서도 현대 창작 무용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에 부합했다.
저음부 위주로 구성된 거문고의 낭랑하고 절제된 선율은 절망을 표현하는 처연한 몸짓을 부각시켰다. 이와 달리 강강술래 부분에선 휘모리장단으로 몰아치는 장구 리듬과 태평소 고음이 감정을 고조시키며 대비를 이뤘다.
이루다는 "전자음악이 섞인 국악이 동시대적 아리랑이란 작품에 꼭 맞는다고 생각했다"며 "기존 아리랑보다는 조금 더 추상적이고 현대적인 느낌을 즐기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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