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람
| 2022-03-16 17:54:00
그들만 비장한 전쟁…영화 '뜨거운 피'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우리나라에 특히나 범죄집단이 많은 걸까. 체감상 한국 영화에 나오는 남자 캐릭터 중 3할 정도는 조폭이나 깡패가 아닐까 싶다.
언제부턴가 이런 유의 영화가 쏟아져나오면서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는 더는 관객에게 신선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장르가 됐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끊임없이 제기돼, 영화가 지켜야 할 윤리성 문제에도 맞닥뜨리곤 한다.
이런 가운데 소설 '고래' 등을 통해 탁월한 이야기꾼 면모를 보여줬던 작가 천명관이 누아르 영화 '뜨거운 피'로 출사표를 던졌다. 동료 작가 김언수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영화감독을 꿈꿨던 천 작가의 연출 데뷔작이다.
1990년대 초 부산 변두리의 작은 포구 '구암'을 두고 벌어지는 밑바닥 건달들의 생존 싸움을 담았다. 배경과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다른 영화들을 통해 익히 보고 들었던 비슷한 이야기다.
구암의 관광호텔 사장 손 영감(김갑수 분) 밑에서 일하는 희수(정우)는 불혹이 될 때까지 건달 생활을 했으면서도 뭐 하나 이룬 것 없는 자기 신세가 갑갑하다. 목돈을 만져보기는커녕 도박 빚만 늘어가고, 오랫동안 사랑한 여자와 결혼까지 앞두게 되자 더 큰물로 가기 위해 결단을 내린다. 마약을 유통하던 라이벌 용강(최무성)을 경찰에 넘기는 것. 방해되는 인물들은 직접 살해하기까지 하면서 희수는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간다.
손 영감을 떠난 그는 성인 오락실 사업을 하며 돈을 벌게 되지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조직과의 싸움에 휘말린다. '전쟁'을 거듭한 끝에 영도파 에이스이자 삼십년 지기인 철진(지승현)으로부터 실은 이 모든 것이 항구를 탐내는 두목이 짜놓은 '그림'이라는 사실을 듣는다.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힌 그는 자기혐오에 괴로워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갈 때까지 더 많은 피를 보고야 만다.
1인칭 시점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영화는 희수 개인의 인생에 초점을 맞춰 점점 더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류 인생을 살던 남자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과정을 폼나게 그리려는 전형적인 범죄 영화의 스토리라 그다지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중간중간 뚝뚝 끊기는 연출 탓인지 희수의 감정 변화는 급작스럽게 느껴지고 쉬이 공감하기 어렵다. 캐릭터들은 저마다 비장함이 가득하지만 관객에게 충분히 전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주먹보다는 회칼이 먼저 나오는 등장인물의 모습은 일부 관객에게 불편함을 유발할 수 있다. 무엇보다, 조폭 영화가 매번 부딪치는 윤리에 대한 비판도 피해갈 수 없을 듯하다. 여성을 대상화·배경화·도구화하는 고질도 여전해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오는 23일 개봉. 상영시간 120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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