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에 출현한 엄태정의 '낯선 자'…"과학과 예술은 친근한 이웃"

철·구리로 빚은 60년 조각 여정…카이스트 미술관서 36점 소개
'탈창조'는 창조 중단 아닌 자아 비움…"나를 버리면 참 내가 된다"

박의래

| 2026-08-24 17:43:55

▲ 엄태정 작 '낯선 자의 출현 I II III' [카이스트 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전시 전경 (대전=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대전 카이스트 미술관에서 오는 26일부터 열리는 엄태정 개인전 '탈창조의 세계로' 전시 전경. 2026.8.24. laecorp@yna.co.kr
▲ 엄태정 작 '철의 향기' (대전=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대전 카이스트 미술관에 설치된 엄태정 작 '철의 향기'. 2026.8.24. laecorp@yna.co.kr
▲ 엄태정 '삼익조' 연작 (대전=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대전 카이스트 미술관에 설치된 엄태정의 '삼익조' 연작. 2026.8.24. laecorp@yna.co.kr
▲ 엄태정 작 '두 개의 날개와 낯선 자 II' [카이스트 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엄태정 작가 (대전=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엄태정 작가가 24일 카이스트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026.8.24. laecorp@yna.co.kr

(대전=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대전 카이스트 캠퍼스 도서관 인근. 사람들의 발걸음이 쉼 없이 스쳐 가는 자리에 세 개의 은빛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았다.

매끈하게 빛을 받으면서도 낯선 형상을 품은 이 작품은 높이 350㎝의 알루미늄 조각 '낯선 자의 출현 I II III'이다.

한국 추상 조각 1세대 작가 엄태정(88)이 카이스트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한국 과학기술 산실에 세운 낯선 존재다.

24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낯선 자란 우리가 마주해야 할 내면의 타자이자 종교의 신"이라며 과학과 예술, 종교가 서로 달라 보이지만 모두 인간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신비와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는 방식으로 "과학과 예술은 친근한 이웃"이라고 말했다.

카이스트 미술관이 오는 26일부터 엄태정 개인전 '탈(脫)창조의 세계로'를 연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작가의 60여 년 작업 가운데 36점을 선보인다.

철·구리·알루미늄·티탄(티타늄) 등 단단한 물질을 통해 인간의 실존과 영성, 비움의 문제를 탐색해 온 궤적을 펼쳐 보인다.

엄태정은 한국 현대 추상 조각 1세대를 대표하는 조각가다.

그의 작업은 금속의 형태를 완결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쇠를 자르고 용접하고 두드리고 연마하는 과정에서 물질의 저항을 견디며, 그 안에 깃든 침묵과 내면의 울림을 찾는다.

이번 전시의 화두인 '탈창조'는 엄태정의 예술 철학을 압축하는 개념이다.

창조를 멈추자는 뜻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성취하려는 욕망, 작품의 주인이 되려는 자아를 내려놓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비울 때 더 큰 존재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비로소 더 큰 창조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작가는 "나를 버리고 탈창조되면 참 내가 된다"며 "소멸 속의 에너지가 발산돼 다시 채워진다"고 강조했다.

'철의 향기'는 약 1t에 이르는 묵직한 덩어리에서 철의 감각을 끌어낸 작품이다. 말굽 모양의 두 개의 묵직한 철재가 서로 비스듬히 기대며 산 모양의 구조를 이룬다. 검은 부분은 철이고, 금속색은 구리로 이뤄졌다.

작가는 "철의 향기를 맡을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게 만든 작품"이라며 "팔로 하트 모양을 만들 때의 형상을 떠올리며 형태를 만들었다. 사랑도 묵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익조' 연작은 작가의 초기 물성 탐구와 영성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금속 세 덩어리가 모여 위로 향한 새의 형상을 이루는 작품으로 상상의 새를 떠올리게 한다.

1970년대 만들어진 작품들이지만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거칠게 남겨진 면은 조각의 '상처'이고, 두드리고 연마해 매끈해진 표면은 그 상처를 감싼 시간이다. 작가는 "아픔의 뒷면에는 기쁨이 있다"며 "아픔과 기쁨이 함께 조각될 때 작품은 무한한 작품성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엄태정은 쇠에서 시작해 구리를 거쳐 2000년대부터 알루미늄 작업을 하고 있다.

'두 개의 날개와 낯선 자 II'는 알루미늄과 티탄이 만들어 내는 은빛 공간으로 '비어 있음'을 드러낸다. 낯선 자를 만나는 시공간을 표현했다.

영국 런던 리젠트 공원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적 야외 조각 공공미술 프로젝트 '프리즈 런던 스컬프처'에 2019년 출품된 작품을 이번 전시를 위해 다듬어 다시 선보인다.

엄태정은 서울대 조소과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세인트마틴미술대학에서 조소를 연구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7년 철 조각 '절규'로 제1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1971년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 1989년 제3회 김세중 조각상, 2014년 제8회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본상을 받았다.

그의 청동 조각 작품 '법과 정의의 상'은 서울 서초동 대법원 중앙정원에 설치돼 있다. 이 밖에도 서울올림픽공원, 인천국제공항, 크로아티아 두브로바 조각공원, 독일 베를린 총리공관 등에 그의 작품이 있다.

전시는 내년 6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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