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훈
| 2022-03-03 17:22:49
환각 증세를 그림 소재로…캔버스에 쏟아낸 아픔
이근민 스페이스K 서울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초등학교 때부터 한 번씩 이상한 징후가 나타났다. 시체 썩는 냄새를 맡거나 구토로 음식물을 한동안 먹을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된 후 정신질환 판정을 받았고 입원 치료를 하게 됐다. 병상에서 겪은 환각, 자신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그에게 고통이자 작업의 원동력이 됐다.
2001년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을 받은 이근민(40)은 치료 과정에서 경험한 환각을 작품 소재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힌 강박과 환각 증세를 예술로 승화한 세계적인 작가 구사마 야요이처럼 정신질환을 작품으로 풀어낸 셈이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정의하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오리엔탈리즘, 이방인, 병자와 같이 다수의 입장에서 '타자'를 규정하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신경정신과 의사가 내린 진단명과 이를 표기한 진단 번호는 자신을 향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정의'(定義)로 느껴졌다.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K 서울에서 10일 개막하는 이근민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에서 그는 자신의 병리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회화와 드로잉 31점을 선보인다.
작품에는 인간 또는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살이나 내장이 가득하다. 해부 혹은 도살의 한 장면처럼 검붉은 핏빛 장기와 창백한 색 피부가 캔버스를 채웠다. 일반적인 전시와는 달리 관람객을 낯설고 불편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런 이미지를 환각으로 대하는 작가의 감정을 짐작게 한다.
파편화된 신체와 장기, 은유적인 형상으로 환각의 이미지를 드러내면서 작가는 개인을 재단하고 분류하는 사회 시스템을 비판한다.
작가에게 회화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고통과 병원에서 내린 진단이 가져온 억압에서 벗어나는 통로이기도 하다.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숨기고 가리게 만드는 세상에서 이근민은 아픔을 캔버스에 쏟아내며 위로받고 이를 관람객과 나눈다.
이근민은 "환각 자체에서 오는 무서움, 불쾌감보다 환각이 보인다는 사실을 의사에게 말하면 입원을 더 하게 될까 걱정했다"며 "환각은 내 작업 세계를 더 심화할 수 있는 소재, 생각할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 전시는 5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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