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나
| 2026-09-14 17:18:03
(목포=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고대 동아시아에서 단단하고 붉은빛을 띤 자단(紫檀)을 '나무의 왕'으로 여겼다. 나무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의미다.
1145년경 편찬된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흥덕왕(재위 826∼836) 대에 신분제인 골품에 따라 함부로 자단을 쓰지 못하도록 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이 일본에 선물했다고 전하는 유물로, 왕실의 '보물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정창원)에 보관 중인 바둑판 역시 자단으로 만들어졌다.
수백 년 전 바닷길을 따라 귀하게 오간 나무인 셈이다.
약 50년 전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서막을 올린 '신안선'에서도 겉껍질을 벗긴 상태의 자단목이 1천여 점 넘게 쌓여 있어 주목받은 바 있다.
당대 해양 교류의 중심에 있던 자단목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15일부터 전남광주 목포시 수중유산박물관(옛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서 '바다를 건넌 나무, 자단' 특별전을 연다.
신안선에서 찾은 자단목 1천여 점을 분석한 성과를 공개하는 자리다.
신안선은 1323년 중국 경원(慶元·오늘날 닝보)에서 일본으로 가다 신안 앞바다에 침몰했다고 추정되는 원나라 무역선이다.
1975년 신안 증도 인근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 6점이 올라오면서 존재가 알려진 뒤 이듬해부터 9년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2만7천여 점의 유물이 확인됐다.
신주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는 14일 "신안선에서 찾은 자단목을 700년 전 동아시아 물류 체계를 생생하게 담아낸 '기록 매체'로 새롭게 조명한 자리"라고 소개했다.
전시는 문자나 문양이 확인된 자단목을 포함해 370여 점의 유물을 비춘다.
신안선 자단목에서는 각종 글자와 기호가 발견된 바 있다.
나무 표현에는 '대길'(大吉), '대일'(大一), '본'(本)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상인들이 화물을 식별하기 위한 표식이라는 게 학계 전반의 의견이다.
최근 조사에서는 원 제국의 공식 문자인 파스파 문자도 새롭게 판독됐다.
전시에서는 '지'로 발음할 수 있는 문자를 마치 도장을 찍듯 거의 비슷한 크기와 형태로 새긴 자단목 5점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연구소 측은 "원나라에서 파스파 문자를 사용하는 집단이 자단목의 소유권을 표시하거나 일본에서의 판매와 유통을 위해 남긴 표식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신안선이 원나라 즉, 몽골 제국의 교역과도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파스파 문자 외에도 한자, 일본 문자가 새겨진 자단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연구소에 따르면 한자가 새겨진 자단목은 약 160점으로, '천삼'(天三), '천육'(天六), '황오'(黃五), '주칠호'(宙柒號) 등의 글자가 확인됐다.
'천'(天)·'황'(黃)·'주'(宙) 등의 글자는 천자문에서 볼 수 있으며 뒤이어 숫자가 나온다는 점에서 천자문을 화물의 분류 기호와 번호로 여겼음을 유추할 수 있다.
자단목 중에서는 '마코사부로', '이야지로' 등 일본인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가나(일본의 음절 문자) 문자와 목간(木簡·글씨를 쓴 나뭇조각)과 짝을 이루는 표식도 나왔다.
신 연구사는 "자단목에 남겨진 다양한 기록은 오늘날의 바코드와 (화물) 송장처럼 화물을 구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는 2만여 점이 넘는 도자, 800만개에 이르는 동전 등 신안선에서 찾은 주요 유물에 가려져 있었던 자단목을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이 일본 쇼소인 소장품을 복제해 만든 자단 바둑판, 자단목으로 만든 중국의 가구, 공예품 등도 소개해 눈길을 끈다.
은은한 향을 지닌 자단목과 함께 발견된 청자 향로 등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수중 발굴 5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행사의 하나로, 연구소는 오는 16∼17일 학술대회를 열어 자단목의 수종과 산지, 문양 등을 연구한 성과를 논할 예정이다.
중국과 일본 전문가들도 참석해 14세기 아시아 해역에서 자단목 무역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일본에서 고급 자단목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등을 설명한다.
연구소는 "붉은 나무가 지나온 바닷길과 그 위에 남겨진 문자와 문양을 따라가며 700년 전 동아시아 바다를 통해 교류했던 흔적을 확인해보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2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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