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8-25 17:00:20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한국 단색화 거장 윤형근(1928∼2007)이 생전 살며 작업했던 서울 서교동 주택이 그를 기리는 공간 '윤형근의 집'으로 문을 연다.
윤형근 에스테이트는 다음 달 1일부터 10월 17일까지 윤형근의 집을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한다고 밝혔다. 내년부터는 봄과 가을에 운영하는 시즌제 공간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윤형근은 1970년대 엄버(umber·갈색 계열 색상)와 청색을 사용한 '천지문'(天地門) 회화로 한국 단색화의 흐름을 이끈 작가다.
제한된 색채와 수직의 색면, 화면 중앙의 여백을 바탕으로 절제된 화면을 구축했으며, 예술과 삶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윤형근의 집이 자리한 터는 윤형근의 장인이자 화가인 김환기(1913∼1974)가 1963년 국민주택으로 분양받은 곳이다. 윤형근은 1967년부터 이곳에서 살았으며, 1983년 기존 주택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었다.
윤형근은 동생 윤도근 전 홍익대 건축과 교수에게 설계를 맡기면서도 공간의 기능과 형태, 재료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베란다를 갖춘 간결한 직사각형 외관과 작업실의 노출형 천장에서는 서구 모더니즘 건축의 미감이, 주거 공간의 목재 마감 천장과 문창살에선 한국적 정서가 드러난다.
공간의 보존·복원 작업은 주택의 구조와 형태, 마감재뿐 아니라 작가가 사용하던 가구와 기물의 배치까지 본래 모습을 지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이라이트는 윤형근이 주 작업실로 사용했던 공간이다. 바닥에는 떨어진 물감 흔적들이 남아 있고, 긴 막대에 부착한 대형 붓 등 그가 사용하던 작업 도구와 직접 디자인한 가구를 주요 작품과 함께 전시했다.
자료실과 영상실에서는 화가이자 남편, 아버지로서의 윤형근을 보여주는 자료를 선보인다.
2층에는 가족과 생활했던 거실과 주방, 안방이 남아 있으며, 고가구와 도자기, 기물, 설치 작품 등을 통해 작가의 취향과 일상을 살필 수 있다.
윤형근은 생전 "예술은 삶의 흔적일 뿐이며, 진실된 삶의 자세가 그림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윤형근 에스테이트는 작가의 작품과 일상의 맥락을 함께 살필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이곳을 운영할 계획이다.
관람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며, 모든 회차는 도슨트와 함께 진행된다.
윤형근의 집 개관을 기념하는 전시도 열린다.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오는 26일부터 시작하는 윤형근 개인전 '윤형근을 다시 상상하다'에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제작된 대형 회화와 한지 작업 등 30여 점이 나온다.
그의 회화는 화면 중앙에 남겨진 여백과 양옆의 색면이 하늘과 땅 사이의 문을 연상시킨다는 의미에서 '천지문'으로 불렸다.
전시는 천지문 회화가 자리 잡은 1970년대 대표작부터 천지문 회화의 근원이 된 초기 작업, 보다 절제된 형식으로 변화한 후기 작업까지 아우르며 작업의 변화를 조망한다.
윤형근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온 작가다. 1947년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운동으로 투옥·제적됐고,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을 겪으며 생사의 기로에 섰다.
1960년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하고 1966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하는 등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973년 숙명여고 미술 교사이던 윤형근은 중앙정보부장이 얽힌 부정 입학 비리를 따지고 들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끌려갔다. '레닌 모자'인 베레모를 썼다는 이유였다. 1974년에는 장인이자 스승인 김환기가 별세하면서 깊은 상실을 경험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자신이 추구해 온 예술적 내면세계를 더욱 깊이 다지게 됐고, 깊은 사유와 절제된 색채로 시대의 상흔과 내면의 시간을 담은 작품들을 남겼다.
윤형근은 귀국 후 경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미술대학 학장과 총장을 지냈고,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도 참여했다.
2007년 작고했지만 2018년에 단색화 작가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이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도 순회전으로 열렸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영국 테이트 모던, 미국 치나티 재단, 시카고 미술관, 도쿄도 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으며, 타계한 지 약 2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주요 미술관과 컬렉션에서 작품이 소개되며 국제적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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