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래원
| 2026-09-06 16:40:02
(서울=연합뉴스) 정래원 기자 =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와 사람을 홀리는 노래로 뱃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바다 요정 세이렌, 인간을 돼지로 만들어버리는 마녀 키르케.
약 3천년 전 쓰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 존재들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손을 거쳐 스크린에 되살아나 천만 관객을 사로잡았다.
영화 '오디세이'의 천만 관객 돌파는 오랜 세월 수없이 변주해온 고대 그리스 신화가 21세기 극장가에서도 강력한 이야기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오디세이'는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분)가 아내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와 아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또다시 10년간 겪는 모험을 그렸다.
영화의 원작은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경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사시 '오디세이아'다.
수천 년 된 고전을 토대로 한 작품이지만, 영화 속 인물과 에피소드 가운데 상당수는 국내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를 이용해 전쟁을 끝낸 일화부터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세이렌의 유혹 등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책과 만화 등을 통해 오랫동안 소개돼왔다.
특히 2000년 11월 출간되기 시작한 가나출판사의 학습만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누적 판매량 1천만 부를 넘긴 대표적인 베스트셀러다.
2000년대 어린이와 청소년이었던 세대는 어린 시절 접한 신화 속 세계를 성인이 된 뒤 대형 스크린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CGV에 따르면 '오디세이' 관객은 전 연령대가 고루 분포한 가운데 20·30대 관객이 전체의 50%를 차지했다.
배급사 유니버설 픽쳐스 관계자는 "어린 시절 책과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신들의 이름을 외우고 영웅들의 모험에 빠져들었던 1990년대생들이 어느덧 극장가의 주요 관객층인 2030 세대로 성장했다"며 "오랫동안 친숙하게 즐겨온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관심이 '오디세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놀런 감독은 관객에게 익숙할 법한 이야기를 자신의 장기인 대규모 스펙터클로 구현해 '보는 맛'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러닝타임 3시간 길이의 전체 분량을 아이맥스(IMAX)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고,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항해하는 장면부터 트로이 전쟁과 거인 폴리페모스와의 대결까지 거대한 화면과 음향으로 구현했다.
사람이 돼지로 변하는 장면이나 거인족과 인간의 대결 등 그림으로만 보거나,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장면도 컴퓨터그래픽(CG)을 최소화해 사실적으로 연출했다.
신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더라도 무리 없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는 점도 폭넓은 관객층을 끌어들이는 동력이 됐다.
놀런 감독은 지난달 내한 간담회에서 "'오디세이아'를 모르는 분들도 있겠지만 최대한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재미있는 모험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관객이 오디세우스의 여정에 초대된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다"며 "갑판과 산, 괴물 키클롭스의 동굴에 관객이 같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화를 아는 관객에겐 상상 속에 머물던 장면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재미를, 모르는 관객에겐 그 자체로 완결된 모험담을 선사한 셈이다.
영화에서 시작된 관심은 3천년 전 원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지난달 5일 '오디세이'가 개봉한 이후 서점가에서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비롯해 관련 고전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며 판매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출판사 현대지성이 출간한 '오디세이아' 고대 그리스어 완역본은 8월 다섯째 주 기준 종합 베스트셀러 5위,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완역한 을유문화사의 '오뒷세이아'는 11위를 기록했다.
어린 시절 신화를 접했던 세대의 추억도 함께 소환됐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초기판은 절판된 탓에 중고 시장에 수십만원대 매물로 올라오기도 했다.
책과 만화를 통해 머릿속에 그렸던 신화를 영화로 확인하고, 영화를 본 뒤 다시 원전과 신화의 세계를 찾아가는 '스크린셀러'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도서뿐 아니라 서사적 연결이 있는 영화를 찾는 흐름도 이어졌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달 IPTV(SK Btv, LG U플러스 tv, 지니 TV 등)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 트로이 전쟁을 다룬 영화 '트로이'(2004)를 구매한 건수는 2만3천653건으로 전월(574건) 대비 4천20.7% 급증했다.
'오뒷세이아'를 22년 걸려 완역한 김헌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뒷세이아'는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작품이라며 "놀런 감독 역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여러 질문을 원작에서 끌어왔고, 영화로 답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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