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혜
| 2026-09-07 16:41:42
(서울=연합뉴스) 고가혜 기자 = "표씨 성을 가졌지만 평생 표시 안 나게 살려고 했습니다. 평생 소처럼 땅만 갈았을 뿐이죠. 그런데 돌아보니 정말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살았더군요."
한국 방송·연극·뮤지컬의 산증인이자 1988년 서울올림픽 등 국가 대형 행사를 이끈 원로 연출가 표재순(89)은 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첫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소담출판사)를 펴낸 소회를 밝혔다.
구순을 앞둔 그가 평생의 연출 인생을 정리해 책으로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책 제목은 과거 대선배이자 국민배우였던 고(故) 장민호 선생이 사석에서 던진 한마디에서 따왔다. 연극 배우로 시작해 연극·뮤지컬 연출가, TV 드라마 PD, 나아가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등 국가적인 대형 이벤트 연출을 도맡았던 그의 폭넓은 행보를 두고 한 말이었다.
표 연출은 "연극만 해서는 밥을 못 먹다 보니 TV 드라마도 하고, 뮤지컬이나 무대 연출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다"며 "하나의 외길을 파지 못하고 여기저기 바삐 산다는 뜻 같아 늘 가슴에 담고 살았다. 반성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제목을 붙였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그는 한국 방송사에 굵직한 이정표를 남겼다. 1967년 동양방송(TBC)에 입사해 MBC와 SBS를 거치며 드라마 '개구리 남편', '수사반장', '대원군', '집념' 등을 연출했고, '제1공화국', '조선왕조 500년', '모래시계' 등을 기획·제작했다.
또 SBS 프로덕션 사장, 세종문화회관 초대 이사장, 재단법인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장,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고 서울예술대, 연세대, 배재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무대에서도 그의 기획력은 돋보였다. 극단 산하와 극단 현대극장의 창단 동인으로 활동하며 '천사여 고향을 보라', '햄릿', '세일즈맨의 죽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수많은 연극을 연출했다. '빠담 빠담 빠담', '피터 팬',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춘희', '대 춘향전' 등 음악극, 뮤지컬, 오페라도 만들었다. 2007년 보관문화훈장, 2014년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무대는 총연출 겸 제작단장으로서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린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이었다.
그는 "올림픽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함께 만든 것이었고, 수많은 드라마와 연극 역시 작가와 배우, 스태프가 함께 일군 공동의 성과"라며 "내가 한 것은 소처럼, 있는 자리에서 우직하게 땀을 흘린 것뿐"이라고 몸을 낮췄다.
'전설의 왕PD', '한국 연출사의 신화' 등 많은 수식어가 그에게 붙었지만, 표 연출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정체성은 단 하나, '만드는 사람'(크리에이터)이다.
"저는 그저 만드는 사람, 연출하는 연출가예요. 영어로 굳이 말하자면 '크리에이터', '디렉터'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다들 너무 과장해서 칭찬을 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의 연출 철학은 명료하다. 표 연출은 "전통에서 찾고, 첨단 기술과 융복합해, 비빔밥(새로운 콘텐츠)을 만드는 게 제가 평생 해온 일"이라고 이른바 '비빔밥론'을 제시했다.
그는 "우리의 전통을 갖고 사람들과 행복과 재미를 나누고 싶었고,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글로벌하게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연극과 TV 매체 등을 통해 우리 역사와 아름다운 국어를 알리는 것이 평생의 목표였다"고 회고했다.
최근 세계 무대에서 비상하는 K-컬처를 향한 응원도 잊지 않았다. 표 연출은 "이름도 없이 무대와 현장에서 피땀 흘려온 선후배 예술인들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 문화의 미래는 매우 밝다"고 힘줘 말했다.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밤을 지새우며 살아온 그가 구순을 앞두고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가족이다.
표 연출은 "평생 일에 치여 집보다 바깥에서 산 시간이 훨씬 길다 보니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한 점이 가장 미안하고 후회스럽다"며 "여생은 열심히 봉사하며 살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배우 신구, 김영옥, 윤복희, 박상원, 박원숙, 임현식, 이계인, 소리꾼 장사익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해 노래, 낭독, 만담 등으로 표 감독의 에세이 출간을 축하했다.
유 전 장관은 "1974년 방송사에 들어와 출연한 첫 드라마가 표 감독님이 연출한 '강남가족'이었다"며 "첫날 첫 녹화여서 NG를 한 시간 이상 냈는데, 끝까지 야단도 안 치고 북돋워 주셔서 녹화를 잘 끝낸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신구는 "고맙고 또 존경한다"며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해달라"고 덕담을 건넸다. 이계인도 "'수사반장'이 없었다면 저는 배우를 못 했을 것"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끝)
[ⓒ K-VIBE.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