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8-26 16:29:42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전시장 안에 닥종이로 만든 실물 크기의 한옥이 서 있다. 서까래와 기둥, 문과 창호의 자국까지 검은 흔적으로 새겨진 서도호(64)의 2022년 작 '러빙/러빙: 서울 집'이다.
서도호의 아버지이자 한국 수묵추상의 거장인 서세옥(1929∼2020) 화백이 창덕궁 연경당을 본떠 서울 성북동에 지은 한옥이다. 서도호는 유년 시절을 보낸 이 집을 닥종이로 감싸고 흑연으로 문질러 탁본으로 고스란히 떠냈다.
제목은 표면을 문지르는 행위인 '러빙'(rubbing)과 장소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러빙'(loving)의 발음적 유사성에서 나왔다. 서도호는 이 작품을 아버지와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설명한다.
집과 이동, 기억과 정체성을 탐구해 온 한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 서도호(64)의 대규모 개인전 '서도호'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27일부터 열린다.
26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서도호는 이번 전시를 불교의 '회향'(回向)에 빗댔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대중과 나눈다는 뜻"이라며 "정확히 들어맞는 표현은 아닐 수 있지만, 해외에서 작업하며 쌓아온 것을 한국 관객들에게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초기작과 대표작, 최근작 등 500여 점을 아우르는 서도호의 최대 규모 전시다. 대학 시절 작품과 200여 점의 드로잉, 대형 설치작품 등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된다.
서도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예일대학교에서 조각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과 유럽 등 여러 지역을 오가며 살아온 그는 지난 30여년간 조각과 설치, 드로잉,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개인과 공동체, 집과 이동,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탐구해 왔다. 이주와 이동의 경험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서도호는 자신이 머물렀던 집과 방, 복도와 계단 같은 공간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천과 금속 등 가벼운 재료로 재현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나 건축물이 아니다. 집은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관계, 기억이 축적되는 장소이자 이동과 함께 옮겨가는 삶의 흔적이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작업은 가족과 공동체, 이주와 사회,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에 관한 보편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특정한 장소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인간이 어디에 속해 있으며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묻는다.
전시는 '시드 뱅크'(Seed Bank)로 명명된 공간에서 시작된다.
유년기의 드로잉과 조각, 대학 졸업작품, 유학 전 설치작업 등 본격적인 작가 활동 이전의 작품과 기록을 모았다. 서도호 예술의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다.
가수 유재하 1집과 봄여름가을겨울 1집의 앨범 재킷 작업에 참여한 흔적도 소개돼, 국제 무대에서 알려진 대형 설치 이전부터 이어진 작가의 시각 언어를 보여준다.
서도호는 "30년 넘게 해온 작업의 시작, 씨앗들을 모은 공간"이라며 "당시에는 무엇이 될지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축적된 경험과 자료가 작업으로 발아해왔다"고 돌아봤다.
'둥지/들'은 22m 규모의 대형 설치작품이다.
서울과 뉴욕, 런던, 베를린 등 작가가 거주했던 집의 복도와 문, 방 같은 전이 공간을 하나의 연속된 건축으로 재구성했다.
서로 다른 장소의 구조가 하나의 통로로 이어지며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불가능한 건축'을 만든다.
관람객은 작품 안을 직접 걸으며 여러 집의 공간을 연속적으로 경험한다.
반투명한 천은 안과 밖,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이 겹쳐 보이게 한다. 관람객은 작품 안을 걸으며 자신의 이동하는 신체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한다.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은 서도호가 여러 도시에서 살아온 집의 기억과 흔적을 하나의 공간으로 재구성한 대형 천 건축 작업이다.
투명한 폴리에스터 천으로 현재 거주하는 런던 집의 내부를 실물 크기로 구현하고, 여섯 곳의 집에서 가져온 문손잡이와 자물쇠, 수도꼭지, 전등 스위치, 콘센트 등 건축적 세부를 천으로 재현해 붙였다.
서로 다른 집의 요소들은 한 구조 안에서 겹쳐지며, 집을 특정 장소의 재현이 아니라 이동과 경험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다시 구성되는 기억의 공간으로 제시한다.
서도호는 "내게 완벽한 집은 서울의 집과 오래 생활했던 뉴욕의 집, 지금 살고 있는 런던의 집에서 한면씩 벽을 모아 삼각형 형태로 짓고 지리적으로는 서울과 뉴욕, 런던의 정 중앙에 지은 집"이라며 "그 위치를 찾아보니 북극점 옆이었다. 그런데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결국 우주로 올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랑의 기억(래코드 협업)'은 최신작이다.
서도호가 자신의 코트 안쪽에 가족의 옷에서 떼어낸 주머니를 다시 달고, 그 속에 가족과 관련된 사물을 담은 신작이다. 몸에 가장 가까이 닿는 옷과 주머니는 가족의 기억과 사랑을 품는 사적인 공간이 된다.
서도호가 오랫동안 집을 통해 탐구해 온 관계와 이동, 기억의 문제는 이 작업에서 한 벌의 옷으로 응축된다. 집이 몸을 감싸는 공간이라면 옷은 그보다 더 작고 가까운 '소우주'인 셈이다.
이 밖에도 초기 드로잉과 조각, 영상, 설치작품, 대형 작품의 미니어처 등이 폭넓게 소개된다.
서도호는 "과거 혼자 살 때는 집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집과 나 사이에 가족들로 채워졌다. 최근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아버지로서 느끼는 부성애가 자연스럽게 들어가고 있다"며 "이처럼 집도, 관계도, 기억도 한 가지 형태로 고정되지 않고 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오는 12월 18일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는다.
높이 6m에 달하는 서도호의 대형 설치작품 '아파트 A, 복도와 계단, 미국 뉴욕 웨스트 22번가 348번지, NY 10011'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 공간에 새로 들어선다.
작가가 뉴욕에서 거주했던 아파트의 복도와 계단을 반투명 폴리에스터 천과 금속 프레임으로 실물 크기 재현한 작업으로, 전체 유닛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관람객은 높은 층고의 서울박스 안에서 작품을 직접 통과하며, 집을 고정된 건축물이 아니라 이동과 기억을 따라 유동하는 공간으로 경험하게 된다.
배우 박보검이 전시 오디오가이드에 목소리 재능기부로 참여해 서도호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
전시와 연계해 오는 30일까지 실드로잉·청사진 기법 체험과 작가·예술제작자 협업 공개 토크 등 관람객 참여형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서울 전시 후에는 일본 도쿄도현대미술관(MOT)과 홍콩 M+로 순회할 예정이다.
전시는 내년 2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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