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현
| 2026-08-18 16:12:13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배우들이 불안해하는 듯 몸부림치거나 무대를 막대기로 때려 둔탁한 소리를 냈다. 뭔가에 쫓기는 듯했다.
악기들은 연주라기보다는 조율하는 소리, 음이탈처럼 들리는 소리를 반복해 불협화음을 내며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긴장감을 조성했다.
지난 15∼1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음악극 '그렇게 바람이 불었고 나는 두 형을 먹었다'는 실체 없는 두려움에 잠식돼 점점 무너져가는 인물을 묘사했다.
작품은 세종문화회관이 동시대의 실험적 공연을 선보이는 기획 시리즈 '싱크 넥스트' 일환으로 기획됐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받은 작곡가 이하느리가 음악감독과 연출을 맡고, 작곡가 신예훈·이한이 음악 제작에 참여했다. 미술가 양정욱은 시노그라퍼(공간 연출)를 맡았다.
이하느리는 지난 12일 공연 개막 전 간담회에서 "작품은 동화 '아기 돼지 삼형제'를 모티프로 했으며 이를 비틀어 실체 없는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작품은 동화의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 늑대와 돼지 삼형제라는 캐릭터, 세 형제의 집을 상징하는 지붕 모양의 선형 구조물 등 일부 장치를 빌려온 정도에 그쳤다.
일반적인 극처럼 등장인물의 대사나 행동에 따라 명확한 서사를 갖고 전개되지 않았고, 장면이 구분되지도 않았다.
배우들은 그저 지휘자와 악기 연주자들이 서 있는 공간과 객석을 돌아다니며 의미가 불명확한 대사와 행동을 반복했다.
첫째 돼지는 비닐을 갖고 다니며 이를 비비고 찢으려고 몸부림쳤다. 둘째 돼지는 객석 주변 난간 등을 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셋째 돼지는 몸부림치거나 소리를 내는 형들의 움직임을 모두 보여줬다.
음악 역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악기가 조화를 이루며 연주한다기보다 한데 뒤섞여 비정형적 소리를 낸다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부는 듯한 효과음, 비명을 연상시키는 전자음, 뚝뚝 끊기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활 긋는 소리, 긴장을 고조시키는 드럼 연주 가운데 간간이 '잘 자라'와 같이 뜻 모를 가사를 외치는 소프라노의 소리가 의도적인 불협화음을 만들며 반복됐다.
이러한 가운데 극은 돼지들이 가진 불안과 공포를 점점 확대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돼지들은 극 초반부 늑대로 표상되는 두려움의 근원에 쫓기는 모습을 보였다. 늑대는 낚싯줄 같은 것을 들고 첫째 돼지를 쫓아다녔고, 돼지는 몸부림치고 괴로워했다.
다만 조명은 일절 늑대를 비추지 않고 의도적으로 어둠 속에 가려 늑대의 존재감을 줄이고 실체가 분명치 않음을 강조했다.
그러다 늑대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이후 돼지들은 존재하지 않는 늑대의 환영에 시달리는 듯 쫓겨 다녔다.
지붕 모양 구조물이 흔들리고 해체된 후, 두 마리 돼지는 쓰러지지만 어디에도 늑대가 돼지들의 집을 부수거나 잡아먹는 묘사는 없었다.
이는 작품의 메시지인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맹신과 두려움'을 암시했다. 이하느리는 간담회에서 "관객은 소문, 신념, 편견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과 공포가 인물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작품 마지막에서 '엘사 게이트' 영상이 재생되는 장면에 이르면 이 같은 메시지는 더욱 명확해진다.
2010년대 유튜브를 중심으로 퍼졌던 엘사 게이트 동영상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 같은 친숙한 캐릭터들이 인분을 먹거나 마약을 하는 등 충격적인 행위를 담은 '엽기 콘텐츠'다. 뚜렷한 줄거리나 내용은 없지만 만화 속 캐릭터들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기괴한 행위와 연출이 공포스럽다.
이하느리는 이러한 영상을 통해 '친숙한 캐릭터와 어린이용 콘텐츠가 주는 불안과 공포'를 거듭 보여줬다. 관객에게 '우리는 무엇에 불안해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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