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8-12 16:06:17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두 개의 금빛 화면 위에 각각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진 인물이 거꾸로 뒤집혀 희미하게 떠 있다. 화려한 금박의 배경과 달리 인물의 형상은 위태로울 만큼 가늘고 덧없다. 한쪽에는 작가 자신을, 다른 한쪽에는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 엘케를 담았다.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2026)의 '그보다 더'와 '비가 많이 왔다'다.
지난 4월 세상을 떠난 바젤리츠가 생애 마지막까지 몰두했던 '골드 페인팅' 연작이다. 두 작품은 검은 벽을 배경으로 나란히 놓여 작가의 마지막 작업을 조용히 마주하게 한다.
독일 신표현주의를 대표하는 거장 바젤리츠의 60여 년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회고전 '게오르그 바젤리츠'가 서울 신문로 세화미술관에서 13일 개막한다.
2007년 이후 약 20년 만에 열리는 바젤리츠의 국내 미술관 개인전이자 작가 타계 후 처음 열리는 미술관 회고전이다. 회화와 드로잉, 조각 등 총 46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연대기 순이 아니라 바젤리츠가 평생 반복해온 형상과 조형적 실험을 따라 구성됐다. 1960년대 초기작부터 아내 엘케의 초상, 2000년대 이후 과거 작품을 다시 해석한 '리믹스', 독수리와 손·발 등의 모티프를 거쳐 마지막 골드 페인팅까지 이어진다.
바젤리츠는 전쟁 말기와 전후 독일의 폐허를 어린 시절 경험했다. 동독에서 성장한 뒤 서독으로 이주한 그는 전쟁의 상흔과 독일 분단의 기억을 작품에 투영했다.
전시장 초입에 놓인 1966년 작 '나뉜 소 두 마리 I'은 캔버스를 분할하고 소의 형상을 절단해 익숙한 시각 질서를 깨뜨린 작품이다. 나치 정권이 목가적 풍경과 동물 이미지를 영웅주의의 상징으로 이용한 데 대한 비판을 담는 동시에 역사적 이미지에서 서사를 걷어내 회화의 물질성과 형식 자체를 구현했다.
기존 질서와 관습에 저항하는 태도는 '거꾸로 그리기'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젤리츠는 1969년부터 대상을 뒤집어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회화에서 당연하게 여겨온 상하좌우의 방향 자체가 자의적일 수 있다고 봤다. 기존의 이미지를 낯설게 만들어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가능성을 찾았다.
무엇보다 익숙한 대상을 뒤집음으로써 관람객이 대상을 알아보는 데서 벗어나 색채와 붓질, 화면의 구조 등 회화 자체에 집중하고, 작품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가능성을 찾았다.
바젤리츠는 생전 인터뷰에서 거꾸로 그리기에 관해 "아이들은 비례나 방향 따위를 모르니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또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며 "나 역시 기존 이미지의 규칙을 깨고 싶었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의 엘케 II'는 바젤리츠가 60여년간 반복해서 그린 아내 엘케의 거꾸로 된 초상 중 하나다. 반추상적 형태와 절제된 색채로 표현된 신체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희미하고 왜곡된 형상은 시간의 흐름과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암시하며, 같은 대상을 끊임없이 다르게 바라본 작가의 조형적 실험을 보여준다.
바젤리츠가 뒤집은 것은 이미지의 방향만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신체를 바라보는 전통적인 위계도 뒤집었다.
손과 발, 머리 등 파편화된 신체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요 모티프가 됐다. 특히 발은 땅을 딛고 서는 신체의 일부이면서 이동과 정착, 취약성과 버팀의 감각을 동시에 환기한다.
바젤리츠는 발을 종종 가늘고 연약하게 그려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과 유한성을 드러냈다. 머리를 아래로, 발을 위로 향하게 한 거꾸로 된 신체 역시 이러한 그의 관점과 맞닿아 있다.
신체를 해체하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뒤집는 태도는 2007년 작 '세 줄 외투'에서도 드러난다. 화면 중앙에는 아돌프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콧수염 난 인물이 역동적인 붓질로 묘사돼 있다. 바젤리츠는 인물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신체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머리를 그려 위압감과 권위를 무력화했다.
이 작품은 2000년대 이후 과거의 주요 작품과 도상을 다시 불러내는 '리믹스' 연작 중 하나다. 과거의 이미지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색채와 구성, 붓질을 달리해 새로운 작품으로 변형했다.
권위를 전복하는 태도는 독일의 상징인 독수리를 거꾸로 뒤집은 '나중에 구두가 발견되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대신 추락하는 듯한 독수리는 권력과 영웅성, 역사적 질서에 대한 고정된 시각을 뒤집는다. 팔레트 나이프로 만든 거친 질감은 대상의 의미보다 회화 자체의 물질성과 자유로운 해석 가능성에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형상을 뒤집고 해체하고 다시 불러내기를 반복한 작가는 생의 마지막에 금빛 화면 앞에 섰다.
전통적으로 신성함과 영원성, 초월을 상징해온 금빛 위에 그가 그린 것은 가늘고 희미한 인간의 몸이다. 노년과 죽음, 소멸해가는 육체의 취약성을 가장 화려한 색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바젤리츠는 생전 "검은색은 미학적 의도의 시작이고, 금색은 그 과정의 끝"이라고 했다.
이번 전시는 애초 작가 생전에 기획됐다. 미술관은 지난 4월 초 독일 현지에서 바젤리츠를 직접 만나 전시 방향과 작품에 관해 논의했다. 그러나 작가가 세상을 떠나면서 결과적으로 유작전이 됐다.
안미희 세화미술관장은 "생전에 작가와 어떤 전시를 만들지 직접 의논했고, 무엇을 보여주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눴다"며 "작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직접 확인하고 함께 협력해 만든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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