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6-24 16:06:51
이성이 잠든 시대의 초상…고야 '카프리초스' 80점 한자리에
궁정화가에서 '어둠의 화가'로…고야의 예술 세계 조명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展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스페인 궁정화가로 로코코 풍의 낭만적이고 화려한 작품을 그리던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1792년 무렵 중병에 걸렸다.
그는 수년간의 투병 끝에 청력을 상실하며 깊은 상실감을 겪었다. 고야는 이 시기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1799년 판화집 '카프리초스'(Caprichos·변덕)를 발표했다.
고야는 80점의 이미지를 통해 교회의 타락, 정치인의 부정, 위선적인 귀족, 스페인에 만연한 미신 문화 등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그는 "인간의 약점과 어리석음을 고발하기 위해 이 판화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판화 형식을 택한 것은 보다 널리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야는 교회를 비판한 메시지로 인해 종교재판소에 소환될 것을 우려해 판매한 지 열흘 남짓 만에 판화집을 회수해야 했다. 판화 원판도 왕실에 기증했다.
고야의 '카프리초스' 80점 전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스페인의 거장 고야: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가 오는 26일부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에 나온 작품은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의 왕립 판화소에서 1881∼1886년에 인쇄한 5번째 에디션이다.
대표작은 '카프리초스'의 43번째 이미지이자 전시명과 같은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다.
화면 중앙에 한 남성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다. 남자 뒤로는 부엉이들이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고 있고, 박쥐 떼는 위협적으로 날아오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스라소니가 주변을 살피고 있다.
남성의 책상에는 작품 제목인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는 글귀가 스페인어로 적혀있다.
인간이 이성을 잃고 무지할 때 괴물과 같은 사회적 광기가 태어나 사회를 위협한다는 의미로, 당시 스페인 사회를 향한 고야의 비판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카프리초스' 외에도 고야의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마련된다.
주요 작품을 미디어 아트와 캔버스에 프린트한 그림들로 재구성해 관람객은 고야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그의 예술 세계를 몰입감 있게 체험할 수 있다.
'귀머거리의 집'을 연출한 공간도 선보인다.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고야는 말년에 스스로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리던 농가로 들어갔다.
그는 세상과 단절한 채 이 집의 벽에 일명 '검은 그림'(Black Paintings)이라 불리는 인생 마지막 역작 14점을 완성했다. 로마 신화 속 사투르누스가 자식을 잡아먹는 장면을 그린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대표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디어 아트 등으로 볼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유엔씨 갤러리는 "고야의 작품은 특정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며 "이성이 흔들리는 순간 드러나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9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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