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
| 2026-08-14 15:56:24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한글학교는 학부모, 선생님, 지역 한인이 함께 재외동포 차세대를 가꾸는 마을의 공동 텃밭입니다. 차세대들에게 생각이 담긴 한글을 가르치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영국 내 22개 한글학교로 구성된 재영한글학교협의회를 이끄는 정경선 레딩한글학교 교장은 1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의 명함에는 '말 사랑, 얼 사랑, 한글 사랑'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한글 사랑이 남다르다.
정 교장은 한글 교육을 '삶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라고 했다. 주말마다 아이들에게 글자를 익히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몸으로 체험하며 자기 뿌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한글학교의 몫이라는 얘기다.
정 교장은 2000년 남편의 유학을 계기로 영국에 정착했다. 주재원이나 유학생보다 영구 거주 한인이 늘자 한글과 한국 문화를 가르칠 배움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뜻을 같이한 한인들과 2014년 레딩한글학교를 세웠다. 한정된 재정으로 학교다운 체계를 갖추고 교사를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교사에게 봉사료 수준의 사례비밖에 지급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정 교장은 "레딩한글학교에는 아마추어 수준의 봉사료를 받으면서 교육은 프로페셔널하게 하는 열정 가득한 선생님들이 있다"며 고마워했다.
학교를 세운 보람을 가장 크게 느낀 순간은 2020년 12월 첫 겨울 음악회였다. 영국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12명을 초청해 경험담을 듣고 학생들이 준비한 연주를 선보였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던 한국이 이제 영국에 한글학교를 세워 다음 세대를 가르치고 역사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참전용사들은 감동했다.
정 교장은 "참전용사들의 말씀을 경청하고 자신들이 연습한 연주를 멋지게 보여준 학생들의 성숙한 모습이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찼다"고 회고했다.
그는 한글학교 졸업생들이 다시 학교를 지키는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했다. 영국 학제 11학년을 마친 뒤 12∼13학년 동안 보조교사로 봉사하고, 겨울 음악회에도 찬조 연주자로 참여한다.
한 졸업생은 2년간 정교사로 봉사했다. 후배에게는 긍정적인 본보기가 되고, 졸업생은 사회에 기여하는 자세를 배우는 선순환이다.
정 교장은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보는 것이 교장직을 이어온 힘"이라고 말했다.
그의 교육 철학은 '아이들은 놀면서 배운다'는 것이다. 현지 학교를 닷새 동안 다니고 방과 후 활동까지 한 학생들에게 토요일 한글 공부를 일방적으로 요구해서는 흥미와 동기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설날에는 전교생이 차례상과 제기·제물, 병풍까지 함께 만들었다. 학부모 앞에서 세배한 학생들은 세뱃돈과 덕담을 받았다. 부모들은 어린 시절 설날을 떠올리며 뭉클했다.
'노래로 불린 시'를 주제로 연 시 낭송회에서는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옛 시와 동요를 읊으며 동심으로 돌아갔다.
종이접기도 놀이와 학습을 잇는 문화 수업이다. 평면의 종이를 나무와 꽃, 과일, 동물, 바구니 같은 입체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성취감과 창의력을 키운다는 설명이다.
국어교육을 전공한 정 교장은 영국에서 자녀를 키우던 중 지역 고등학교의 요청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모국어 화자를 위한 국어교육과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이 전혀 다른 영역임을 깨닫고 경희사이버대 한국어학과 3학년에 편입해 한국어교원 2급 자격도 취득했다.
그는 지역 고등학교 한국어 수업에도 종이접기를 접목한다. 완성작은 스크랩북에 모아 한 학기 뒤 학생들에게 작품집으로 돌려준다.
정 교장은 2024년 종이문화재단(이사장 노영혜)과 K-종이접기(Korea Jong ie jupgi)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최근 재단 후원으로 종이접기 강사 자격증과 어린이 급수 장학 과정을 운영했다.
지난 3∼7월 진행된 과정에는 9개 한글학교 교사 26명과 학생 21명이 신청해 교사 22명이 수료했고, 학생 14명이 3급부터 1급까지 3단계 과정을 마쳤다.
비대면 수업의 실효성을 두고 처음에는 우려도 있었지만, 중도 탈락자가 적었고, 단계가 올라갈수록 성취도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 교장은 "원격으로 수업이 가능할지 걱정했는데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다니' 싶을 만큼 수준 높은 작품을 냈다"고 전했다.
이어 "학부모들도 모처럼 디지털 기기에서 벗어나 아이와 함께 좋은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며 "자기 주도적으로 몰입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교사들도 감동했다"고 덧붙였다.
교사가 종이접기 강사 자격을 얻으면 각 한글학교에서 학생을 직접 가르칠 수 있어 교육 효과는 한 번의 과정에 그치지 않는다.
정 교장은 "각 나라와 대륙의 학생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원격 문화 과정을 서서히 확대할 만하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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