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7-22 15:59:45
(수원=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아기처럼 웅크린 작은 여자아이. 그러나 주름진 얼굴과 돼지같은 코, 거친 털로 뒤덮인 몸은 아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과 동물이 뒤섞인 듯한 이 존재는 호주에서 활동하는 작가 패트리샤 피치니니(61)가 탄생시킨 생명체 '바쳐진 존재'다.
처음에는 낯설고 기괴하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이 존재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탐구해온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상징이다.
피치니니의 국내 첫 미술관 개인전 '패트리샤 피치니니: 킨쉽'(kinship)이 수원시립미술관에서 23일부터 열린다. 전시는 실리콘과 유리섬유, 실제 머리카락 등을 이용해 상상의 생명체를 극사실 조각으로 구현하며 생명, 기술, 돌봄의 문제를 다뤄온 작가의 예술 세계를 조망한다. 조각과 사진, 영상, 설치, 아카이브 자료 등 총 56점을 선보인다.
제목 '킨쉽'은 친족이나 혈연, 가족 관계를 뜻하는 말이지만, 피치니니는 이를 인간 중심의 관계를 넘어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맺는 연결과 책임의 의미로 확장한다.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 가족과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상상의 생명체들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등장하는 시대에 인간은 어떤 존재와 관계를 맺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묻는다.
전시의 시작을 여는 작품은 '바쳐진 존재'다. 사람을 닮았지만 온몸이 털로 덮인 이 생명체는 관람객을 피치니니의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관람객이 이 작품만큼은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했다. 차갑고 기괴한 존재가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결을 가진 생명으로 느끼길 바라는 뜻에서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피치니니는 "사람들이 직접 만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희생해 앞으로 만날 작품들과 관람객을 연결해 주는 존재"라며 "부드럽게 만져보는 경험을 통해 전시 전체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어린나무'는 인간과 식물이 결합한 듯한 어린 생명체를 한 남성이 목말을 태우고 있는 형상이다.
호주 멜버른의 한 주유소 부지에서 자라던 나무를 지키려는 원주민 공동체의 보호 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된 생명이란 점을 보여준다.
피치니니는 "'어린나무'는 자연과 기술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를 상상한 작품"이라며 "인간과 식물이 결합한 존재처럼 기존의 범주로 구분할 수 없는 생명체와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질문한다"고 말했다.
대표작 '의심하는 토마스'는 낯선 생명체 앞에 선 소년의 모습을 담았다. 소년은 두려워하기보다 생명체의 입 안으로 손을 넣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부활한 예수의 상처를 손으로 만져본 뒤 믿음에 이르렀던 사도 토마스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종교적 도상을 현대적으로 변주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묻는다.
피치니니는 "낯선 존재를 마주한 소년이 두려움과 의심보다는 호기심을 갖고 직접 만지며 경험하려 한다"며 "눈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몸으로 경험하며 타자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했다.
'연인'은 인간도 동물도 아닌 두 생명체가 한 침대에 누워 서로를 끌어안은 모습이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몬스터가 자신의 짝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던 장면에서 착안했다. 소설에서는 괴물의 짝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파괴되며 비극으로 끝나지만, 피치니니는 "만약 두 존재가 사랑을 나누고 새로운 생명을 이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하며 이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생명체를 만들기만 하고 사랑을 주지 않으면 결국 비극이 벌어진다"며 사랑과 돌봄이야말로 서로 다른 존재가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이란 메시지를 담았다.
2002년 작 '신생가족'은 생명공학으로 탄생한 듯한 어미와 새끼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처음에는 기괴하게 보이지만 새끼를 품고 보살피는 어미의 모습은 인간의 모성과 다르지 않다.
다른 동물에서 인간 장기를 키우는 기술이 현실이 된 시대에 우리는 어디까지를 생명으로 인정하고, 어떤 존재에게 책임을 질 것인지를 묻는다.
피치니니는 "내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다른 종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그 생명체 앞에 서면 그 결정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며 "그 생명체에도 우리와 같은 모성애와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공감과 연민이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피치니니가 만든 생명체는 처음에는 낯설고 기괴하게 보이지만, 작품을 따라갈수록 공감과 연민의 대상으로 바뀐다. 생명의 다양성과 타자에 대한 이해, 서로를 돌보며 공존하는 삶이 전시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피치니니는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며 "그렇다면 우리는 그 생명들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를 늘 고민해왔다"고 했다. 이어 "내 작품 속 생명체는 처음에는 낯설고 추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오래 바라보면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며 "관람객들이 이 존재들을 사랑하게 되는 여정을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호주로 이주한 피치니니는 생명공학과 포스트휴먼 담론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2003년 제5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호주관 대표 작가로 참여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호주 국립미술관과 네덜란드 쿤스트할 로테르담, 인도네시아 마찬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와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뉴 로맨스' 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선 작가 인터뷰와 작업 자료, 기록 영상 등을 통해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소개해 관람객이 작품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전시와 연계한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24일 31일 생명과 공존을 주제로 한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25일에는 피치니니가 직접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아티스트 토크가 진행된다.
전시는 11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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