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무크 "120년 전 페스트 때와 인간 행동·영혼 닮았죠"

노벨상 작가 '페스트의 밤' 출간…"사실적 묘사가 카뮈 '페스트'와 차이점"
"푸틴 공격은 원시적…다시 중세 도래", "여성주인공 소설 계속 쓸 것"

이은정

| 2022-03-28 15:52:09

▲ '페스트의 밤' 출간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무크 [민음사 제공]
▲ 한국 매체와 화상앱으로 인터뷰하는 오르한 파무크 [민음사 제공]
▲ '페스트의 밤' 출간한 오르한 파무크 [민음사 제공]

오르한 파무크 "120년 전 페스트 때와 인간 행동·영혼 닮았죠"

노벨상 작가 '페스트의 밤' 출간…"사실적 묘사가 카뮈 '페스트'와 차이점"

"푸틴 공격은 원시적…다시 중세 도래", "여성주인공 소설 계속 쓸 것"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70)는 "죽음이란 것은 우리에게 형이상학적인 것을 사고하게 만든다"며 40여 년간 전염병을 주제로 한 소설을 구상한 이유를 밝혔다.

국내에서 11번째 장편 소설 '페스트의 밤'(Nights of Plague)을 출간한 그는 최근 연합뉴스를 비롯한 한국 매체들과 한 공동 인터뷰에서 "페스트 창궐 당시 인간 영혼의 반응,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서술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페스트의 밤'은 1901년 오스만제국 하의 민게르란 가상 섬에 페스트가 퍼지며 벌어지는 혼란상을 그린다. 권력의 무능과 오만, 방역 조치에 대한 반란, 종교적 분열 등 전염병이 촉발한 사태를 다루면서 서구열강에 휘둘리는 오스만제국, 민게르섬의 독립에 이르기까지 장대한 서사가 전개된다.

파무크는 "이 책에서 페스트를 민족주의의 부상, 제국의 붕괴 후 작은 국가들의 탄생, 그리고 이 모든 사회적 변화를 촉발하는 것으로 봤다"며 "이 소설은 민족주의의 뿌리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카뮈의 '페스트'와 견줘 "'페스트'가 나치의 프랑스 점령을 묘사한 정치적 알레고리(풍유·諷諭) 소설이라면, '페스트의 밤'은 페스트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팬데믹 소설"이라고 차이를 소개했다.

그는 팬데믹 가운데 일어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푸틴의 공격은 아주 원시적이며, 중세적인 행동"이라며 "어떤 의미에서 중세가 다시 도래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터키 출간 1년 만에 한국어판으로 나왔다. 이어 이달 독일과 프랑스에서 출간됐으며 영미판은 하반기 나올 예정이다. 인터뷰는 이 작품을 번역한 이난아 한국외국어대 터키어과 교수가 질문을 취합해 화상앱 줌으로 진행했다.

다음은 파무크와의 일문일답.

-- 오랜 세월 전염병 소재 소설을 구상한 계기와 1901년의 페스트를 다룬 이유는.

▲ 오랜 세월 전염병에 대해 생각해왔다. 죽음이란 것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사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서양인 여행가가 쓴 회고록 등을 읽으며 동양의 운명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제3차 페스트 전염병 자료를 보며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런데 최근 10년간 이 주제에 집중하며 방역 시행의 어려움, 방역과 격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저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배경은 오스만제국 등의 붕괴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페스트를 민족주의의 부상, 제국의 붕괴 후 작은 국가들의 탄생, 이 모든 사회적 변화를 촉발하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졌을 때 현실이 소설과 닮아 오히려 재미를 반감시킬 우려는 없었나.

▲ 그런 우려를 많이 했다. 서둘러 터키에서 제가 쓰는 소설에 대해 인터뷰하고 미국 뉴욕타임스에 글을 기고했다. 전 세계에 전염병이 확산하니 제가 영향을 받아 급하게 이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 100년이 넘는 간극에도 전염병에 대응하는 인간의 반응이나 혼란을 초래하는 모습 등이 닮았는데.

▲ 정부, 주지사, 군수, 대통령, 총리가 먼저 전염병을 부인한다는 점이 비슷하다. 현재의 편한 상태 혹은 질서가 흐트러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전염병은 빠르게 퍼지고 이 전염병을 누가 가져왔는지 소문이 확산한다. 방역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닮아있다. 자신들의 삶이 힘들어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과거와 다른 점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했다면, 지금은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 전염병에 관한 작품이지만 권력의 허영심, 혁명과 독립, 그리고 국가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왜 전염병이 이런 주제와 연결된다고 생각했나.

▲ 소설은 페스트 창궐 당시 인간 영혼의 반응,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소설은 오스만 제국 말기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제 생각에 오스만 제국은 제국의 내적 갈등이었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붕괴하지 않았다. 소설에서 페스트 문제를 제외하고, 오스만 제국 말기의 풍경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봤다고 생각한다.

-- 소설에서 '미나 민게를리'라는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독립을 선언한 민게르섬에서 여왕으로 선출된 파키제 술탄의 증손녀다. 후손이 서신을 바탕으로 당시 이야기, 섬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형식인데.

▲ 많은 것을 서술하고 싶어 사건들을 요약하는 서술자가 필요했다. 먼저 오스만제국의 귀족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고, 저는 여성 주인공을 통해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여성 주인공이 사건의 내부에서 모든 것을 보고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는 소설을 쓸 계획이다.

-- 코로나19를 경험하며 전 세계가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공유하는 시대가 됐다. 팬데믹 이후 인류의 삶은 어떻게 변화할까.

▲ 두 가지 형태로 변할 것 같다. 먼저 건축적인 측면이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방, 서로 가깝게 붙어 있는 작은 장소들, 식당들, 창문이 없는 곳은 그 중요성이 사라질 것이다. 직장에도 가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줌을 통해 한국 기자들, 독자들과 얘기하고 있다. 집 안의 질서가 더 중요하게 되고 직장보다는 집에 투자하는 돈이 더 많아질 것이다.

-- 우크라이나 사태로 팬데믹에 전쟁의 비극까지 더해졌다. 왜 인류는 과거 경험에서 진일보하지 못할까.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는 우리나라다'라고 해도 미국이 전투기를 띄우지 않고 있다.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가련한 우크라이나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푸틴의 공격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아주 원시적이며, 중세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중세의 회귀'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글처럼, 어떤 의미에서 중세가 다시 도래했다.

-- '바늘로 우물파기'라는 기법이 작품 세계를 구현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나.

▲ 저는 인내심이 많은 작가이다. 아주 천천히 소설을 쓴다. '내 이름은 빨강'을 쓸 때, 특히 역사 소설을 쓸 때 많은 참고 서적을 읽고, 조사하고, 메모하고, 나중에 이것들을 거대한 심포니 오케스트라처럼 작은 부분들 하나하나를 합치시킨다.

-- 소설 창작 때 전략 혹은 글이 안 써질 때 극복하는 방법은.

▲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저처럼 소설 한 편을 4년 혹은 5년 동안 쓰는 작가가 자기 자신을 안다면, 소설의 어떤 부분을 언제 써야 할지 알게 된다. 저는 소설의 1페이지부터 700페이지까지 순서대로 쓰지 않는다. 다른 작가들에 비해 먼저 계획을 많이 세운다. 이야기를 충분히 전개하고, 이후 챕터들을 나누고, 쓰다가 어느 부분에서 막히면 그 부분을 그대로 두고, 두 챕터 다음 혹은 세 챕터 다음으로 가서 쓴다.

-- 한국 독자들에게 한마디.

▲ 한국에서 제 작품이 사랑받는 것이 너무나 좋다. 한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다시 가고 싶다. 이 팬데믹이 끝나면 가겠다. 저는 낙관론자로 팬데믹이 끝날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에 가서 박물관들도 다시 방문하고 싶고, 거닐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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