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현
| 2026-08-06 15:44:48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하얀 마스크를 착용한 관객이 공연장에 우르르 입장한다. 편안하게 객석에 앉는 대신 이들은 7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한 거대한 무대 곳곳으로 바삐 흩어진다.
무대에 있는 100곳가량의 방 어디에선가 20여명의 등장인물이 저마다 연기를 펼치고 있고, 관객은 그렇게 작품 속으로 빠져든다.
지난 5일 서울 중구 매키탄 호텔에서 공연한 '슬립노모어'는 '이머시브(Immersive) 공연의 끝판왕'으로 불린다.
이머시브 공연은 관객 참여를 유도해 몰입감을 높이는 공연을 뜻한다. 슬립노모어가 이 분야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일부 코너에 참여하도록 한 게 아니라, 객석을 아예 없애고 관객을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 그 자체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2003년 영국에서 처음 제작돼 뉴욕·상하이 무대에 오르며 독창성으로 입소문을 탄 '슬립노모어'는 지난해 7월 매키탄 호텔에서 국내 초연의 막을 올렸다. 공연은 '논버벌'(non-verbal) 방식으로, 배우들은 말하는 대신 무용과 몸짓으로 대사를 전달한다.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의 줄거리를 차용했다. 마녀에게 왕이 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듣고 욕망에 사로잡힌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가 덩컨 왕을 살해하고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큰 틀은 같다.
다만 배경은 1930년대 스코틀랜드로 설정됐으며 전체적인 연출은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의 스타일을 모방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복도 같은 공간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배경음악 등이 대표적 특징이다. '맨덜리' 바 등의 장소는 히치콕의 영화 속에서 이름도 따 왔다.
관객은 입장과 동시에, 이러한 배경의 7층짜리 매키탄 호텔 어딘가에 갑자기 뚝 떨어지게 된다. 초반 안내를 겸하는 배우들이 관객을 분리하기 때문에 시작 지점도 저마다 다르다.
일반적 공연의 관객은 객석에 앉아 하나의 무대에서 시간순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바라보면 된다.
그러나 슬립노모어에서는 공연 속 세상 그 자체에 들어간 것과 다름이 없다. 관객은 배우와 구분되기 위해 하얀 가면을 쓰지만, 무대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다. 배우의 바로 옆에서 연기를 바라볼 수도, 매키탄 호텔 곳곳을 탐험할 수도 있다.
관객이 특정 층에서 특정 인물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동안 다른 층에서는 또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러한 방식과 동시성은 관객이 짜여진 줄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대 속에서 사건을 짜맞춰 줄거리를 만들게 만든다.
이날 공연에서 기자의 관극 시작 시점은 매키탄 호텔 6층의 '황야'였다. 주인공인 맥베스도, 맥베스 부인도 없는 썰렁한 황야에 떨어지자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공연의 방식에 적응하자 이렇듯 시작 지점을 다르게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작품 전체로 보면 공연의 중심 축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 맥베스 부부의 서사다. 그러나 관객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날 공연의 중심 축이 되는 인물은 매번 달라진다. 이날 기자는 황야에서 '간호사' 역할의 배우를 가장 먼저 만났다.
간호사의 시선과 이야기를 따라가며 층을 이동하다 보니 이내 맥베스 부인과 맥베스, 그에게 예언을 내리는 마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서로 얽히는 등장인물의 동선을 따라 그때그때 궁금한 인물과 장면을 선택함으로써 지켜보는 배우와 장소가 달라지는 셈이다.
이렇게 관객이 자유의지로 시점을 바꿔 가며 스스로 퍼즐 맞추듯 짜가는 플롯이야말로 공연이 의도한 바다. 이로써 관객은 무궁무진하게 다양하고 독특한 경험을 누릴 수 있다.
관객은 더 이상 '이 장면에서 다른 캐릭터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라든지 '다른 장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를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해당 시간대에 그 곳에 직접 가 보면 되기 때문이다.
단점도 있다. 한 번의 감상으로 작품 속 모든 이야기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처음 감상하는 관객은 특정 장면을 놓쳐 아쉬울 수 있다. 서사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우니 사전 정보가 없으면 이해하기도 어렵다. 7개 층을 오르내리며 무대를 탐험해야 하기에 체력은 필수다.
그러나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나만의 경험'을 선사하는 '슬립노모어'의 독특한 형식은 높은 재관람률을 이끌어내고 있다.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시점과 감상의 가능성은 '수십 번을 관람했다', '100번을 감상했다'는 관객까지 나오게 만드는 요인이다. '슬립노모어'는 오픈런(무기한 공연) 형식으로, 6일 기준 9월 공연까지 예매 가능하며 이후 일정은 1∼2개월 단위로 순차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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