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8-05 15:33:43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흰 담은 단순한 흰색이 아니다. 미색과 분홍빛, 푸른빛이 감도는 색들이 서로 섞이지 않은 채 나란히 놓이고, 그 사이로 나무와 빛이 번진다. 가로 5m가 넘는 이대원(1921∼2005)의 대작 '담'(1986) 앞에 서면 풍경은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관람자를 감싸는 공간이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오는 6일부터 11월 8일까지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이처럼 색과 빛의 세계를 통해 화가 이대원을 새롭게 읽는 전시다.
전시 제목은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이 이대원의 그림을 두고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 평에서 가져왔다. 슬픔을 외면했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오랜 회화적 축적 끝에 환하고 평정한 세계로 승화한 이대원의 예술을 가리킨다.
이대원은 '빛을 데생하는 가장 행복한 색채화가', '화단의 신사' 등으로 불렸다. 과수원과 산, 나무를 원색의 점과 선으로 채운 그의 그림은 오랫동안 작가의 낙천적 기질과 연결돼 설명됐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 밝음이 단순한 성정의 결과가 아니라 전통 공예와 동양화의 조형 원리를 유화의 언어로 변용한 치열한 탐구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자수의 색실, 나전의 빛, 목가구의 고색, 동양화의 운필과 준법은 그의 화면에서 색점과 색선, 색면으로 다시 태어난다.
전시는 1930년대 초기작부터 말년의 대형 회화까지 유화 120여 점과 아카이브 100여 점, 작가 수집 고미술품 등을 통해 이대원의 약 70년 화업을 조망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대원은 나전과 자수, 전통 회화의 점과 선을 유화로 새롭게 구성하며 한국적 현대회화의 정체성을 치밀하게 실험한 작가"라며 "한국 미술이 주목받는 지금, 단순히 소재가 아니라 미감과 조형 원리로 한국성을 구축하고 관람자를 화면 안으로 이끄는 동아시아적 회화 공간에 도달한 그의 성취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초기작 '북한산'은 북한산의 지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가을 산의 인상을 색채로 재구성한다.
백운대와 인수봉의 흰 화강암 봉우리는 진홍과 자주로 바뀌고, 짙푸른 하늘과 강하게 대비된다. 대상의 고유색을 따르지 않고 계절의 감각을 화면의 구조로 삼은 이 작품은 훗날 이대원 회화에서 중요해질 색채 실험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본래 제목이 '가을 산'이었음이 새롭게 확인됐다.
이대원의 대표적 회화 세계는 1970년대 이후 본격화한 '농원' 연작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파주 농원에 화실을 마련한 뒤 수십 년 동안 같은 장소를 반복해 그렸다. 그러나 농원은 하나의 고정된 양식이 아니라 시기마다 다른 풍경으로 나타난다. 봄의 꽃나무, 가을의 들판, 산과 하늘은 색점과 색선, 색면으로 촘촘히 쌓이며 계절과 빛, 시간의 감각을 품는다.
1970년대에는 근경·중경·원경이 구분되는 삼단 구성과 정지한 색점이 두드러졌고, 1980년대에는 공간이 압축되며 방향성을 지닌 색선이 풍경에 생동감을 더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원경이 사라지고 평면성이 강해졌다.
이대원의 색점은 서양 점묘법처럼 관람자의 눈에서 섞여 보이도록 한 것이 아니라, 자수의 색실처럼 각각의 색이 고유한 빛을 유지한 채 화면 위에 축적된다. 그의 화면은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을 넘어 관람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산수적 공간으로 변한다.
대작 '담'은 이대원이 축적해 온 색채 언어를 가로 5m가 넘는 대형 화면에 펼친 작품이다.
흰 담과 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은 멀리서 보면 평온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수많은 색이 서로 섞이지 않은 채 깊이 있는 화면을 이룬다.
어두운 옻칠 바탕에 박힌 자개가 저마다 빛을 내듯, 이대원의 색은 화면 속에서 독립적으로 반짝인다.
외교부가 소장한 이 작품은 오랜 시간 주미한국대사관에 설치돼 한국 회화의 고유한 미감을 전해 왔다.
2000년 작 '인왕산'은 이대원이 평생 다져 온 색채와 붓질, 풍경과 산수의 감각을 한 화면에 집약한 역작이다.
잎을 떨군 나무 두 그루 사이로 남청빛 산줄기가 낮게 이어지고, 화면 전체를 감싼 청색 위로 붉고 푸르고 흰 색점과 색선이 눈발처럼 흩날린다. 원근은 거의 사라지고, 산과 나무, 하늘의 경계는 색과 붓질의 리듬 속에 고르게 스며든다.
유화임에도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담백한 발색으로, 만년에 도달한 자유로운 회화 세계를 보여준다.
종로 갤러리현대 옥상에서 촬영한 여러 장의 인왕산 사진을 이어 보며 가로 5m에 이르는 대작으로 완성했다.
이대원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한국 미술계의 기반을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1959년부터 약 8년간 한국 최초의 상업 화랑 격인 반도화랑을 운영하며 박수근, 장욱진, 김기창, 김환기, 유영국 등의 작품을 소개했고, 한국 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학장, 총장을 지내며 미술교육 토대를 다졌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과 외교통상부 문화홍보외교사절로도 활동했다. 창작과 교육, 전시, 문화행정과 외교가 그의 삶 안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내달 10일에는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전시 연계 국제학술대회도 열린다. 그동안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던 이대원의 회화 세계와 미술사적 위상을 논의한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대원은 한국 미술을 전시하고 가르치며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문화적 지식인이자, 자신의 회화에서는 한국적인 현대 회화의 가능성을 평생에 걸쳐 탐구한 화가"라며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이대원의 위상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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