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8-18 15:00:39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2023년 여름, 베트남 출신 프랑스 작가 흐엉 도딘(81)은 개인전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는 서울을 떠나기 전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1931∼2023)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언어가 달랐던 두 사람은 한국어·영어·프랑스어 통역을 거쳐야 했다.
한참을 대화하던 중 박서보가 "자연이 내 스승이다. 항상 자연을 관찰한다"고 말했고, 이를 전하려던 순간 도딘은 "다 이해했다"며 통역을 만류했다. 자연과 세상을 바라보는 결이 비슷한 두 사람이 예술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도딘이 프랑스로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 10월 박서보가 세상을 떠났다. 도딘은 흰 바탕 위에 안료를 겹겹이 쌓아 올린 추상 회화 'X.K.N.31'을 완성하고 '오마주 투 박서보'라는 부제를 붙였다.
서울 연희동 박서보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20일부터 박서보와 도딘의 예술 세계를 함께 돌아보는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이 열린다. 박서보의 작품 25점, 도딘의 작품 17점이 소개된다.
두 작가는 절제된 행위와 오랜 시간 축적한 물질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 깊이 있는 회화적 공간을 구축했다.
박서보가 물에 불린 한지 위에 선을 긋고 밀어내며 지우기를 반복한 묘법 연작으로 행위와 시간의 축적을 화면에 담았다면, 도딘은 광물 안료를 수십 차례 쌓아 올려 색의 층위에서 빛을 드러낸다.
박서보의 차남인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가 도딘이었다"며 "작가 측과 계속 소통하면서 두 작가가 통하는 부분이 있어 같이 전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시 대표작은 도딘이 박서보와 만난 뒤 이를 기억하며 제작한 회화 'X.K.N.31'이다. 나무 패널 위에 캔버스를 붙이고 광물 안료를 수십 차례 쌓아 올려 작가 특유의 흰색 회화 세계를 구현했다.
도딘은 "박서보 선생은 위대한 예술가를 넘어 작품을 통해 인간다움을 전하는 분이었다"며 "같은 언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창작은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고 미술관을 통해 전했다.
박서보의 '묘법 No.230127', '묘법 No.230128', '묘법 No.230129'는 작가만의 흰색의 정수를 보여준다. 가로 192㎝, 세로 330㎝ 크기의 대작들로 박서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그림들이다.
이 작품들은 박서보 미술관의 상징 공간인 '큐브'에 전시된다.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8m인 정육면체형 전시실로, 반투명 유리를 통과한 자연광이 실내를 채운다.
이유진 박서보재단 이사는 "도딘의 흰색은 8살에 프랑스로 이주한 작가가 처음 본 흰 눈의 감동과 눈이 녹으며 그 안에 숨겨졌던 빛을 표현한 것"이라며 "반면 박서보의 흰색은 조선백자의 회백빛과 삼베처럼 누르스름한 빛, 표백되기 전 자연 그대로의 흰색을 닮았다"고 설명했다.
박서보의 2010년 작 '묘법 No.100915'도 중요 작품이다. 타는 듯한 붉은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작품이다.
박서보는 2000년 일본 후쿠시마 반다이산에서 작은 단풍잎이 내뿜는 붉은 색에 매료됐고 이후 자연의 색을 작품으로 남겼다.
생전에 그는 "햇빛을 받으면 타오르고,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면 검붉게 변하는 단풍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며 "그 순간 모든 근심, 걱정이 그 붉은 빛에 다 타서 없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박서보의 예술세계를 계승하고 동시대 미술과 새로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마련된 박서보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열린다.
20일 문을 여는 박서보미술관은 지하 2층∼지상 3층, 건축면적 2천㎡ 규모로 3개 전시실과 커뮤니티 공간, 야외 정원 등을 갖췄다.
박 이사장은 "박서보미술관은 박서보의 작품과 자료를 체계적으로 연구·보존하는 한편,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기획전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문화적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1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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