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희
| 2026-09-04 14:38:14
(서울=연합뉴스) 박원희 기자 = 정진영은 1988년 연극 '대결'을 시작으로 40년 가까이 연기의 삶을 이어온 베테랑 배우다.
역대 세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왕의 남자'(2005), '7번방의 선물'(2013), '국제시장'(2014) 등 히트작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지만, 정진영은 대표작을 꼽는 것을 주저해왔다. 자기 손가락과 같은 작품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게 어색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4일 서울 성동구 키다리스튜디오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준익 감독의 숏드라마 '아버지의 집밥'이 자신의 대표작이 될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많은 히트작을 건너뛰고 처음 도전한 숏드라마가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걸 모르겠네. (웃음)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배우들은 자기 작품 보는 것을 낯설어해요. 제 모습을 왜곡된 거울로 보는 듯한 불편한 느낌이 있는데, 이 작품은 두 번 봤는데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투명하게 감정을 교류하는 배역이었어요."
그만큼 정진영이 연기한 하응이라는 인물 안에 배우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의미일 터. 실제로 하응에게는 누구나 공감할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
'아버지의 집밥'은 가부장적인 남편 하응(정진영 분)의 요구에 맞춰 평생 집밥을 만들어온 아내 순애(이정은)가 사고로 요리법을 잊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고리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이준익 감독이 처음 도전한 숏드라마다.
극 중 하응은 40년간 집안 밥상의 절대 권력자로 살아온 인물이다. 반찬 하나하나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고 때로는 마음에 안 든다며 밥상을 엎기도 한다.
그러면서 가족 부양을 가장의 책임으로 인식하고 그것에 평생 헌신해온 아버지이기도 하다.
정진영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세상을 여유롭게 사는 아버지는 없는 것 같다"며 "하응은 특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리 옆에 있는 뻔한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그는 "그래서 관객들이 그 감정을 깊이 있게 따라오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진영은 덥수룩한 수염에 배 나온 하응의 모습과 신혼 때의 뜨거움은 사라지고 밋밋한 감정만 남은 부부간의 관계도 언급하며 "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갖는 감성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응은 아내 대신 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시작한다. 처음에 아내가 병에 걸린 것인지, 연기를 하는 것인지 반신반의하며 요리해오던 하응은 이윽고 드러나는 진실에 자기 삶을 되돌아본다.
정진영은 "부끄럽지만, 저도 요리를 못한다"며 "아내와의 첫 뜨거움을 기억하며 살아야지, 하응처럼 뒤늦게 눈물을 흘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웃음 지었다.
정진영은 이번 드라마로 다시 한번 이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왕의 남자'를 비롯해 '황산벌'(2003), '즐거운 인생'(2007), '평양성'(2011), 최근 시리즈 '욘더'(2022)까지 20년 넘게 작업해온 이 감독을 가리켜 정진영은 "천재"라고 표현했다.
"이 감독님은 기존에 하려던 것을 계속하려고 하지 않아요. 집착하지도 않고요. 비슷한 얘기인 것 같지만 끊임없이 변화하시죠. 최근작들로 갈수록 더 좋아지시는 것 같아요. '자산어보'(2021)도 아름다운 이야기고 '욘더'도 다른 경지로 갔고요. '아버지의 집밥'도 대표작을 경신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진영은 세로형 화면이라는 숏폼으로 형식이 바뀌었지만, 이를 고려해 연기를 다르게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보다 좀 더 간소화된 현장에 차이점을 느끼며 연기했다고 돌아봤다. 평소 촬영보다 카메라와 스태프와의 거리가 가까웠던 점도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정진영은 "통상 스태프들도 제 연기를 보고 같이 반응하는데, 가까이에서 그들의 열기와 감정을 느끼니, 부담스럽지만 재밌기도 했다"며 "관객들도 이 정도 온기로 제 연기를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멀리서 보기보다는 인물의 감정 속으로 깊이 들어오는 게 숏폼의 장르적 특성 중 하나인 것 같다"고 짚었다.
숏폼 플랫폼에서 선보일 예정이었던 '아버지의 집밥'은 오는 9일 롯데시네마에서 개봉해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게 됐다.
정진영은 뜻하지 않게 개봉하게 됐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을수록 관객분들에게 좋지 않나 싶다"며 "'아버지의 집밥'은 가족 이야기로서 평범한 우리네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정진영은 앞으로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사라진 시간'(2020)으로 영화감독으로서 데뷔하기도 한 그는 연기자로서, 연출자로서 관객들에게 개성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계획이다.
"60살이 넘어서 '난 엄청나게 대단한 배우가 되고 감독이 될 거야'라는 욕망을 갖는 건 이상한 거 같아요. 연기를 하면서 가장으로서 살았고 지금도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죠. '저 사람은 자기 것이 있네'라는 평을 받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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