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아프리카 알고보면⒂ 튀니지, 스타워즈 배경 넘어 '제 목소리'

이은별 한동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조교수

우분투추진단

| 2026-03-31 07:00:04

▲ 이은별 교수 [이은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아프리카 튀니지 지도 [제작 양진규]
▲ 튀니지 토주르 인근 옹 주멜에 위치한 스타워즈 '모스 에스파'세트장(2015년 1월 필자 촬영)[이은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시디부사이드 전망대 가는 길에서 만난 튀니지인들(2015년 3월 필자 촬영) [이은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우분투칼럼] 아프리카 알고보면⒂ 튀니지, 스타워즈 배경 넘어 '제 목소리'

이은별 한동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조교수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지난 1월 두바이에서 열린 국제 AI 영화제의 100만달러(약15억원) 상금은 튀니지 출신 주베이르 즐라시(Zoubeir Jlassi) 감독의 영화 '릴리'(Lily)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제는 두바이 정부가 글로벌 콘텐츠 산업 육성을 위해 주관하는 '원 빌리언 어워드 서밋'(1 Billion award summit)의 일환으로, 올해는 구글의 AI 플랫폼인 제미나이(Gemini)와 협력해 열린 공모전이었다. 첨단 기술과 탄탄한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한 전 세계의 쟁쟁한 출품작들 가운데 튀니지 감독의 수상은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대중에게 튀니지는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 촬영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남부 사하라 사막의 관문 도시인 두즈(Douz)와 베르베르 전통 가옥이 남아있는 마트마타(Matmata), 그리고 토주르(Tozeur) 인근 사막 지대는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속 사막 행성 '타투인'의 실제 배경이다. 이곳에 조성된 '모스 에스파'(Mos Espa) 세트장은 여전히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성지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낙타의 목을 닮은 지형에서 이름이 유래한 옹 주멜(Ong Jemel)은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모가디슈'(2021), 김성훈 감독의 '비공식작전'(2023), SBS 드라마 '배가본드'(2019) 등 아프리카·중동을 배경으로 한 한국 콘텐츠들은 제2의 할리우드라 불리는 모로코 와르자자트(Ouarzazate)의 전문 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 반면 튀니지는 사정이 다르다. 별도의 인공 세트에 의존하지 않아도, 자연 그 자체가 이미 완성된 거대한 스튜디오와 같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튀니지는 세계 영화시장에서 단순히 타인의 이야기를 위한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튀니지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영화 정책이 있다. 문화부 산하 국립영화영상센터(CNCI)는 영화 제작 지원뿐만 아니라 매년 카르타고 영화제를 포함한 문화 산업 정책 전반을 담당한다. 특히 신인 감독들의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공공 기금을 운용하고, 아프리카 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불법복제 유통을 엄격히 단속해 건강한 배급 환경을 관리한다.

이와 같은 정책적 지원으로 튀니지 영화 산업은 안정적인 창작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단시간에 다작을 쏟아내 비공식 유통망으로까지 배급하는 나이지리아 영화 산업(놀리우드)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됐다.

한편 튀니지의 선진적인 여성 인권 정책은 여성 감독의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초대 대통령인 하비브 부르기바는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 이후 교육 기회 확대와 여성 권리 강화를 근대화의 핵심 가치로 내걸었다. 무엇보다 이슬람권 국가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법으로 금지하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독려했다. 그 결과 튀니지 출신 여성 감독들은 국제 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21년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피부를 판 남자'(The Man Who Sold His Skin)의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는 2026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에 '힌드의 목소리'(The Voice of Hind Rajab)를 후보작으로 올리며 다시금 그 저력을 입증했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폭력의 이미지에 피로감을 느꼈다면, 가자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폭격당한 차에 홀로 갇혔던 6살 힌드의 실제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영화는 구조 요청 지점까지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임에도, 오직 전화기 너머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운명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극대화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무력함을 커다란 돌덩이처럼 관객들의 가슴에 얹는다.

이러한 영화는 75년간 이어진 프랑스 식민 지배와 세속주의 이슬람을 추구한 사회문화적 토대 위에서 다져진 것이다. 사하라 사막의 초입을 기꺼이 영화 촬영지로 내놓으며 시작된 튀니지의 영화 산업은, 이제 세계 영화시장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막대한 제작비나 화려한 연출 기술로 채워진 콘텐츠이기보다 인간의 본질, 즉 존재 자체의 가치 그리고 첨단 기술로도 구현할 수 없는 섬세한 감정을 포착해 내는 것이 바로 튀니지 영화의 매력이다.

이번 국제 AI 영화제 수상작 역시 AI로 복잡한 영화적 장치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제목인 '릴리' 이름의 인형으로 인간의 양심을 10분 미만의 서사로 완성해 낸 것만 보더라도 튀니지 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필자가 10여 년 전 튀니지의 명소 시디부사이드(Sidi Bou Said)에서 마주쳤던 튀니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면,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특유의 흰 벽과 파란 대문들 사이 길섶에서 기꺼이 마주 앉아 바이올린을 켜던 튀니지 청년의 모습이 곧 튀니지의 자화상이었다. AI시대가 도래하고, 세계 곳곳의 참혹한 현실이 우리를 짓누를지라도 인간의 양심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제 목소리를 냈다. 아프리카 알고 보면, 그곳은 더 이상 낯선 배경이 아니라 세계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중심이다.

※외부 필진 기고는 연합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은별 교수

현 한동대 커뮤니케이션학부 조교수, 성균관대 컬처앤테크놀로지융합전공 초빙교수, 한국외대 미디어외교센터 전임 연구원 역임. 에세이 '경계 밖의 아프리카 바라보기, 이제는 마주보기' 외교부 장관상 수상, 저서 '시네 아프리카' 세종도서 선정 및 희관언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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