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경
| 2026-05-29 07:00:06
[여행honey] 남원의 국악 꿈나무, 동편제를 잇다
(남원=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전북 남원은 판소리의 고장이다.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이 남원이다. 우리의 대표적인 고전소설인 춘향전과 흥부전의 무대다. 남원은 '춘향의 고장'이면서 '흥부가 태어난 곳'이다. 남원은 판소리의 한 유파인 동편제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 흔적을 따라가 보고, 명맥을 이어가는 현장을 찾았다.
◇ 동편제의 탯자리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에 등장해 대종상 신인여우상 등을 휩쓴 배우 오정해는 영화 데뷔 1년 전 남원에서 열린 춘향선발대회에 참가해 '미스 춘향 진'에 뽑혔다.
오정해는 동편제의 본고장에서 '춘향'이 된 뒤 스크린을 통해 서편제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렸지만, 동편제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남원 시내에서 승용차를 타고 북동쪽으로 30여분을 가면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닿는다.
마을 입구에는 고수(鼓手)가 치는 북 형태의 돌 조형물에 '동편제 탯자리 비전마을'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바로 뒤편에 판소리의 '중시조'라 불린 송흥록(1801~1863년)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스피커를 통해 동편제 가락이 구성지게 흘러나왔지만, 송흥록의 단칸 생가는 꽤 쓸쓸해 보였다.
송흥록은 웅장하고 호방한 창법의 판소리 유파인 동편제를 정립했다. 동편제는 활달하고 우렁차면서 구절의 끝마침이 명확해 흔히들 '남성적'이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슬픈 가락을 많이 사용하는 서편제는 구성지고 애절하다.
생가 앞마당에는 부채를 들고 소리를 하는 송흥록과 앉아서 북을 치는 동생 송광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소리에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태어난 송흥록은 조선후기 판소리의 '가왕'으로 칭송됐다.
판소리에는 '일고수 이명창'(첫째가 고수요, 둘째가 명창이다)이라는 말이 있다. 소리꾼이 고수와의 호흡을 맞추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의미다.
소리하는 형만 점점 유명해지고, 자신은 소외되는 것을 참다못한 송광록이 북을 내팽개치고는 제주도로 내려가 형에 못지않은 득음을 하고 돌아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송흥록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송광록과 그의 아들 송우룡, 손자 송만갑 등 송씨 가문이 동편제의 대를 이어갔다.
송만갑에 이어 남원에서는 김정문, 이화중선, 박초월, 장재백, 강도근 등 숱한 명인·명창이 배출됐다.
2023년 남원에 기반을 두고 설립된 사단법인 '판소리연구소춘향'은 남원 판소리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맥을 잇기 위해 매년 학술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힘써고 있다.
또 명창들의 소리 자료를 디지털화하고,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현대적 창극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넒히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 진양조와 귀곡성
송흥록은 매부 김성옥으로부터 진양조를 처음 듣고 이를 갈고 닦아 완성했다. 진양조의 완성은 판소리를 '길거리 공연'에서 '성악 예술'로 격상시킨 계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형제의 동상 옆에는 청동으로 된 24개의 동그란 구체가 조성돼 있다.
판소리에서 가장 느리고 긴 호흡을 가진 진양조장단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진양조는 24박으로 이뤄져 있다.
그 옆에는 5개의 사각기둥 조형물이 있다. 이는 경상도 민요의 메나리조에 사용되는 5개 구성음을 표현한 것이다. 송흥록은 전라도 소리인 판소리에 경상도 민요 선율인 메나리조를 도입했다. 판소리의 지역적 한계를 넘은 것이다.
송흥록은 귀곡성(鬼哭聲)이라는 창법으로도 유명하다. 말 그대로 귀신의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송흥록이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 옥중 신세를 한탄하는 대목을 할 때가 귀곡성의 절정이다.
소리가 섬뜩하면서도 워낙 애절해 청중 속에서 눈시울을 적시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송흥록이 소리를 공부하다가 어느 여인의 무덤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나타난 귀신으로부터 귀곡성을 물려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이성계의 황산, 국악의 성지
생가 바로 옆에는 국악 전문 복합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른바 '국악의 성지'다. 동편제 판소리의 발원지를 성역화한 것이다.
박물관, 전시관, 국악 선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 실내외 공연장 등이 조성돼 있었다.
언덕에 있는 3개의 동굴형 독공장이 눈에 띄었다. 소리꾼들이 득음을 위해 혼자 발성 연습을 했던 굴을 재현한 것이다. 문이 잠겨 내부를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국악의 성지는 황산(해발 698m) 자락에 조성돼 있다.
고려 말기인 1380년 이성계는 황산 일대에서 왜구를 크게 섬멸하고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한 황산대첩의 업적을 이뤘다. 황산대첩비지는 비전마을 바로 옆에 있다.
조선 선조 때 이곳에 승전을 기념하는 대첩비가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했다. 1970년대에 와서 비각이 건립되고 파괴된 비석 조각들이 파비각으로 안치됐다.
두께가 5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듯한 거대한 비신(碑身)의 한가운데가 쩍 갈라진 채 파비각 안에 누워 있었다.
일제가 저 두꺼운 비석을 무엇으로 훼손했을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 흥부의 흔적
비전마을에서 차량으로 10여분 떨어진 인월면 성산리는 흥부가 태어났다고 알려진 곳이다. 흥부전의 배경이다.
이 마을에는 흥부가 제비의 은혜를 갚기 위해 지은 다리인 '연산교', 놀부의 묘로 추정되는 '박첨지 묘', '화초장 바위' 등이 있다.
흥부가 놀부에게 쫓겨나서 유랑하다가 정착한 곳이 아영면 성리다. 성산리와는 차로 25분 거리다. 흥부가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라고 한다. 흥부의 생가는 단칸 초가집 형태로 복원돼 있었다.
마을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길가에 흥부와 흥부의 처가 박 타는 모습의 조형물을 만난다.
생가 입구에 발로 밟아 곡식을 빻는 디딜방아와 아궁이, 장독대 등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박춘보(흥부의 모델)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도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망제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망제를 지낸다고 한다.
흥부와 놀부는 과연 실존 인물일까 하는 물음을 새삼스럽게 되뇌면서 마을을 빠져나왔다.
실존이건, 아니건 간에 그들이 남겨준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은 영원하지 않을까 싶다.
◇ 광한루의 춘향, 세계의 춘향
남원 시내로 들어오니 한국 최고의 전통문화축제인 춘향제를 하루 앞두고 그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춘향제는 1931년 6월 20일(음력 5월 5일, 단옷날) 남원 지역의 유지들이 춘향사를 짓고, 권번의 기생들이 사당에서 춘향제사를 지낸 것이 효시였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악기를 가르치고 영업 활동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춘향제는 제일(祭日)을 춘향과 이도령이 광한루에서 처음 만난 단옷날에 맞춰 지내오다가 1934년 제4회 때부터 농번기를 피해 춘향의 생일인 음력 사월 초파일로 바꿨다. 이후 1999년부터 양력 5월 5일을 전후해 열리고 있다.
초기 춘향제는 전국 각지의 권번에 속한 대표급 기생들이 제관을 맡고 지역의 유지와 국악인들이 참가해 엄격한 유교적인 형식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제례에서 향토문화제로, 전통문화축제로 변화를 거듭했다.
마침 춘향제 개막 전야에 광한루원 앞 특설무대에서 글로벌춘향선발대회가 열렸다.
이번 대회에서는 김하연(22·경기 파주·한양대 졸)씨가 '춘향 진'에 뽑혔다.
우크라이나 출신 유학생인 리나(23·경북대 대학원)씨가 '춘향 미'에 뽑혀 눈길을 끌었다.
춘향선발대회는 2024년부터 외국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진선미중에 외국인이 선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의 춘향이 '세계의 춘향'이 되고 있다.
광한루원의 풍경은 임금과 왕비 옷차림을 하고 오작교를 유유자적 거니는 60대 초반의 부부가 압권이었다.3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딸이 이날 부모님을 '현대판 견우와 직녀'로 만들어준 거 같았다.
서울에서 여행 온 이 가족의 행복한 하루를 사람들은 부러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바라봤다.
우리나라 4대 누각에 해당하는 광한루.
조선 명종 때 심은 팽나무와 선조 때 오작교를 축조하면서 심은 왕버들 등 500년 세월을 버틴 나무들이 광한루의 역사를 머금고 있다.
막돌 초석 위에 세워진 광한루 낡은 기둥을 보면서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가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관광객들을 보면 누각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광한루에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 판소리 꿈나무들의 사랑가
광한루원 북문 입구 쪽에 있는 '안숙선명창의여정' 앞마당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시끌벅적하다.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이 당차게 흘러나왔다.
부채를 손에 쥐고 제법 소리꾼다운 자태를 과시한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으로 구성된 '판소리 꿈나무'들의 야외수업이었다.
안숙선명창의여정은 판소리 대가인 안숙선 명창의 예술적 생애를 기리고 판소리의 가치를 보존·전승하기 위해 건립된 복합 문화공간이다. 안숙선 명창의 제자인 김미나 명창이 관장을 맡고 있다.
남원 출신인 김미나 명창은 안숙선 명창의 부름으로 국립창극단 26년의 활동을 정리하고 2020년 안숙선명창의여정 개관에 맞춰 고향으로 내려왔다.
김미나 명창은 다음 해 판소리 동편제 고장의 맥을 잇고 인재 발굴을 위해 남원시와 협의해 청소년 국악단을 설립했다.
국악단은 춘향제 개막식 축하공연, 청와대 K-MUSIC 페스티벌, 대한민국 국악 페스티벌 공연, 영동세계국악엑스포, 프랑스 공연 등 국내외 무대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작년 9월 영동세계국악엑스포에서는 세계 30여개국 참가단과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도 시나위 가락, 춘향가 중 사랑가, 홍보가 중 화초장 대목 등 판소리와 농부가, 강강술래, 까투리타령, 진도아리랑 등 민요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다.
김 명창은 "소리꾼으로서 죽는 날까지 판소리를 놓지 않고 공부할 것"이라며 "우리 판소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뒷받침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해맑은 소리꾼들이 우리 판소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들이 동편제를 잇는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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