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우
| 2023-03-30 11:10:26
밤베르크 심포니의 드보르자크…'오케스트라의 이상'을 구현하다
체코 출신 야쿠프 흐루샤 지휘…특유의 보헤미안 색채 맘껏 뽐낸 명연
(서울=연합뉴스) 나성인 객원기자 = '보헤미안 톤'이라는 독특한 음향적 전통으로 명성이 높은 밤베르크 심포니가 지난 29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7년 만에 두 번째 내한 무대를 가졌다. 인구 7만에 불과한 독일 바이에른주의 작은 도시 밤베르크에 위치한 밤베르크 심포니는 그 전통만큼은 거대한 악단이다.
첫 내한이 명예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와 함께였다면 이번에는 악단의 수장인 지휘자 야쿠프 흐루샤와 함께 했다. 오늘날 토마시 네토필과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지휘자인 흐루샤는 악단의 오랜 고전적, 낭만적 전통에다 전임 조나단 노트가 성공적으로 넓힌 현대적 색채까지 손색없이 이어가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1부 첫 곡으로는 흐루샤와 밤베르크 심포니가 최근 음반으로도 녹음한 브루크너의 교향적 변주곡이 연주되었다. 어두운 다단조의 주제와 바그너를 연상시키는 금관의 팡파르가 대조되는 서곡풍의 작품으로, 짧지만 극적인 구성이 특징이다. 현악 파트의 짜임새 있는 맞물림과 그 뒤를 받치는 금관의 균형은 다음 곡에 대한 기대를 높이기에 충분했다.
이어진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협연으로 선보였다. 이 곡은 일반적인 협주곡과 달리 피아노 독주와 관현악이 악구를 잘게 나눠 가지며 정교하게 맞물리도록 쓰인 교향적 협주곡이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는 긴 호흡으로 주제를 끌어가거나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기보다는 관현악과 한 몸이 되어 수시로 변하는 악상에 '참여'하게 된다.
다만 이날 김선욱의 연주는 악단의 연주와 한 몸을 이루기보다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악단과 모티브를 주고받으며 협주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급했고, 독주를 이끄는 짤막한 부분에서는 다소 처지는 루바토로 인해 전체적인 짜임새가 헐거워졌다.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협주곡에서는 악상의 호흡이 길어 독주자가 보다 자유롭게 변화를 줄 여유가 있지만, 변화무쌍하고 악구가 조밀한 슈만 협주곡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로 인해 1악장에서는 관현악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피아노 독주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고조되는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사색적이고 시적인 정조는 훌륭하게 표현되었고 1악장의 카덴차도 인상적이었으나, 전반적으로 악상의 변화와 세밀한 뉘앙스, 전개로 만들어지는 추동력이 약했다.
피아노와 관현악이 대화를 나누듯 펼쳐지는 2악장은 무난했다. 3악장에서는 주제에 내포된 복합적인 리듬이 다소 평면적으로 표현되었다. 강세의 다양한 변동에서 나오는 아기자기한 리듬의 유희가 다소 밋밋하게 흐른데다 셈여림과 악상의 흐름이 효과적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대신 흐루샤가 이끄는 밤베르크 심포니는 긴밀하고도 훌륭한 앙상블을 들려주었고, 특히 독주 악기들의 색채, 현악기군의 응집력 등은 아주 탁월했다. 김선욱의 피아노보다 악단이 전체를 지탱했다.
2부에서는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이 연주되었다.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명연이었다. 1악장 첫 음에서부터 관객을 사로잡아 4악장 마지막 음이 울릴 때까지 듣는 이를 놓아주지 않은 대단히 집중력 있고 매혹적인,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잊게 할 만큼 훌륭한 연주였다. 밤베르크 심포니는 특유의 유명한 보헤미안 톤의 진가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플루트와 오보에는 더없이 촉촉하고 정감 어린 음색을 들려주었고, 클라리넷, 바순의 연주는 민속적인 생명력 그 자체였다. 현악은 기민한 연주 안에서도 풍성한 울림을 자랑했다. 특히 베이스는 따뜻하면서도 선명한 선율로 시종일관 악단의 든든한 토대가 되어줬다. 호른, 트럼펫, 트롬본 등의 금관 또한 대단했다. 호른은 화성을 채워줄 때는 따뜻하고 솔로로 나설 때는 강렬했다. 당당한 트럼펫도 훌륭했지만, 셈여림과 관계없이 선명하고도 따뜻하며 낭만적 음색을 지닌 트롬본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흐루샤는 이처럼 훌륭한 악단에 즉흥적인 몸짓, 점진적으로 달아오르는 열정, 천진함, 신명 나는 춤의 움직임 등 다채로운 '악흥의 순간'을 불어넣었다.
1악장 첫 주제의 유장한 현악과 천진한 플루트, 2악장 첫머리에 목관 앙상블의 조화롭고 열정적인 전개, 3악장의 유연한 왈츠풍의 몸짓, 마지막 4악장의 생명력 넘치는 변주 과정까지 모든 부분이 뛰어났다. 무엇보다 단순히 기술적 숙련도를 넘어 악단에 대한 자부심, 지휘자에 대한 신뢰, 작품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혼신의 몰입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모든 연주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여 모든 것을 쏟아내는 연주는 흔히 만나기 어렵다. 흐루샤와 밤베르크 심포니의 이날 무대는 '오케스트라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대답을 보여준 시간이었다.
lied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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