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람
| 2022-04-29 14:03:00
이창동 "OTT로 쇼핑하듯 작품감상…영화 본질 저버리지 말아야"
전주영화제 특별전…첫 단편 '심장소리'·다큐 '아이러니의 예술' 공개
"OTT 제안받았지만 좋은 작품 못 만나…삶과 영화의 연결 느끼게 하고파"
"한국영화 위상 25년 전과 달라져…나도 귀퉁이에서 노력"
(전주=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쇼핑하듯 볼 수 있는, 보다가 지루하면 빨리 돌려버리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영화들이 아니라, 영화에 나를 맡기고 느끼면서 같이 경험하는 그런 영화들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장용 영화가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 이창동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본질은 외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감독은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개최를 기념해 29일 중부비전센터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영화는 어떤 매체보다 다른 인간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다"며 "인류가 이런 매체의 본질적인 힘을 사라지게 할 일은 없고, 또 그러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 역시 OTT 측으로부터 (영화 연출) 제안을 여러 번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면서 "꼭 OTT라서 그런 건 아니고, 할 만한 이야기라고 판단한 작품을 아직 만나지 못해서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저는 분명하고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메시지, 쉬운 카타르시스는 관객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난다고 생각하거든요. 관객에게 질문을 남기고, 삶과 영화가 연결되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어떤 관객이든 계급이나 환경을 넘어서 개개인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의미로 확장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감독은 이번 특별전을 통해 첫 단편 '심장소리'와 프랑스 출신 알랭 마자르 감독이 이 감독의 작품 세계를 분석한 다큐멘터리 '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을 공개한다.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부터 최근작 '버닝'(2018)에 이르는 6편을 4K 화질로 리마스터링한 버전도 세계 최초로 선보인다.
'심장소리'는 몇 해 전 세계보건기구(WHO)와 베이징현대예술기금(BCAF)이 세계 감독들에게 우울증을 주제로 한 단편영화를 의뢰하면서 기획에 들어갔다.
이 감독은 "여러 감독 중 내가 가장 마지막에 제안을 수락했는데 가장 먼저 만들었다"며 "팬데믹으로 다른 감독의 작품들이 늦어졌고, 전주영화제 특별전에서 내가 만든 거라도 먼저 공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우울증을 앓는 엄마(전도연 분)를 걱정해 수업 도중 집으로 뛰어가는 여덟 살 철이(김건우)의 시선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타워크레인에 올라 농성 중인 해고노동자 아버지(설경구), 엄마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걱정하는 어린 아들이라는 관계를 통해 한국이 앓고 있는 '사회적 우울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감독은 "엄마를 구해야겠다는 인간의 아주 원초적인 욕망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고통 같은 것을 관객이 공유하기를 바랐다"며 "아이가 엄마에게서 느끼는 심장 소리를 관객도 느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해고노동자 가족 이야기는 당초 장편으로 선보이려고 했지만, 벽에 부딪히게 되면서 실험적으로 단편에서 같은 설정을 사용했다고 이 감독은 설명했다.
그는 다른 장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항상 준비하고 고민하고 계획한다"면서 "숙성이 안 돼서 유보하거나 접는 과정을 거친다. 또 공수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씀 못 드리는 걸 이해해달라"며 웃었다.
'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은 애텀 이고이언, 더글러스 서크 같은 영화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알랭 마자르 감독 측이 참여를 제안했다. 마자르 감독은 칸국제영화제에서 '박하사탕'을 처음 본 뒤 이 감독의 팬이 됐다고 한다.
영화에서 이 감독은 지금까지 만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고, 함께한 배우들도 출연해 당시의 기억을 되짚는다. 영화의 배경이 됐던 장소를 수십 년 만에 다시 찾는 시간 여행을 하기도 한다.
이 감독은 "마자르 감독이 촬영 직전 팬데믹 때문에 한국에 오지 못해서 줌으로 소통했다"며 "설명하는 것만 나온 거 같아서 아쉽긴 하다. 감독이 자기 영화를 설명하는 게 참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뒤돌아보는 기회도 얻었다.
그는 "이번 영화제에서 영화의 관객 반응을 보고 내가 나갈 길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겠다"고도 했다.
이 감독은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말에 "80년대 정치·사회·경제 문제들이 짓누르던 시기에 작품 활동을 하며 다져진 정체성이 작가로서의 토대가 돼 지금까지도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지난 25년간 한국 영화가 질적으로 성장해 세계 영화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이 감독은 20여 년 전 '초록물고기'로 밴쿠버영화제에 초청됐던 때를 회상하며 "당시 관심 밖이던 한국 영화가 주목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노력했다"며 "지금은 세계인을 놀라게 하는 재능이 많이 나왔다. 나도 한쪽 귀퉁이에 같이 노력했다는 점에서 감회가 새롭다"고 밝혔다.
"제 생각에 한국 영화의 힘은 '다양성'에 있다고 봅니다. 감독마다 색깔이나 성격이 모두 다른데, 이런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잘 없어요. 또 다른 이유는 다른 나라 콘텐츠가 가지지 못한 다이내믹한 힘이 느껴진다는 거예요. 어쩌면 한국 사람들이 그동안 여러 사회 문제를 뚫고 살아내며 생긴 생명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들이 세계 관객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가지 않나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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