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정
| 2022-04-19 12:03:35
애틋한 사부곡 썼던 소설가 박기원, '낭만가객' 남편 곁으로
18일 노환으로 별세…'세월이 가면' 작곡한 이진섭씨가 남편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어머니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쓰시던 육필 일기가 장롱 속에 가득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일기를 쓰는) 목표가 사라져 간단한 메모 형식으로 쓰셨죠."
지난 18일 노환으로 별세한 소설가 박기원(93)의 장남인 이기광 씨는 부친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했다.
이씨는 19일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아버지께서 애주가여서 어머니의 예전 일기를 보면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며 "아버지 때문에 속앓이를 하시다가도 화해하고, 포용하셨다"고 말했다.
숙명여대를 졸업한 박 작가는 서울신문과 경향신문 등에서 일한 기자 출신 문인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은평구 거주 문인들의 모임인 '은평클럽' 멤버였다.
그가 절절한 사부곡을 쓸 정도로 사랑했던 남편은 언론인이자 음악, 연극 등 많은 분야에서 재능을 보인 이진섭이다. 이진섭은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 즉흥적으로 곡을 붙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56년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던 명동의 한 술집에서 이 노래를 만들고, 함께 있던 나애심과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부부의 만남도 드라마틱하다. 두 사람은 박 작가가 1949년 서울신문에 입사하며 알게 됐지만, 이후 피란 시절이던 1953년 부산에서 다시 만나게 돼 이듬해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 작가는 남편이 1983년 3월 세상을 떠난 뒤 사부곡을 담은 책 '하늘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1983)와 '그대 홀로 가는 배'(1994)를 펴냈다. '하늘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에는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진섭'이란 부제가 붙었다.
이씨는 "어머니는 아버지뿐 아니라 가족에게 모든 걸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며 "어머니가 '세월이 가면'을 부른 박인희 씨의 라디오 생방송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즉흥적으로 써 낭송해주신 기억이 난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긴 절절한 글이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먼저 떠나신 아버지가 고양시 탄현의 한 공원묘지에 계시다"며 "이른 시일 내에 두 분의 유해를 경기도 납골당에 함께 모시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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