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람
| 2022-03-22 11:45:58
스릴 사라진 스릴러…영화 '배니싱: 미제사건'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영화 '배니싱(Vanishing): 미제사건'에서 사라진 건 실종자뿐만이 아니다. 스릴도 함께 사라졌다. 미제로 남은 것은 살인사건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 의도인 듯하다.
프랑스 감독 드니 데르쿠르가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은 한국 형사와 프랑스 법의학자가 공조해 신원 미상의 변사체에 얽힌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스코틀랜드 작가 피터 메이가 중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킬링 룸'을 각색해 올로케이션으로 한국에서 촬영했다. '007퀀텀 오브 솔러스'로 잘 알려진 프랑스 배우 올가 쿠릴렌코와 유연석, 예지원 등 한국 배우들이 호흡을 맞췄다.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바 있는 데르쿠르 감독이 이끄는 제작진과 프랑스·한국 배우의 만남으로 눈길을 끌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김이 팍 샌다.
범죄·스릴러 장르를 내걸었는데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서스펜스는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형사 진호(유연석 분)는 얼마 전 발견된 신원 미상의 여성 변사체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심하게 부패해 지문조차 확인할 수 없자 그는 한국에 와 있던 프랑스 법의학자 알리스(올가 쿠릴렌코)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알리스는 자신이 고안한 지문 복원 기술로 피해자의 신원을 밝힌다. 한국에 입국해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중국인으로, 얼마 전 실종된 여자다.
진호를 비롯한 경찰들은 피해자가 장기밀매 사건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범인 추적에 나선다. 장기 적출을 위해 메스를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알리스의 통역사 미숙(예지원)의 의사 남편 닥터 리(이승준)다. 장기밀매 조직의 마수에서 꼼짝 못 하던 그는 급기야 어린아이의 심장을 구하기 위해 아내를 시켜 납치극까지 벌인다.
장기밀매는 한국에서 새로운 소재가 아니다. 괴담처럼 떠도는 말도 많고 '공모자들'(2012) 등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배니싱: 미제사건'은 이런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준다. 범인이 누구인지, 다음에 전개될 일이 무엇인지 패를 다 까놓고 시작하니 스릴을 느낄 틈이 없다.
개연성 또한 부족하다. 알리스가 고안해낸 지문 복원 법은 허술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고, 팔에 난 구멍 자국을 보고 장기밀매를 단박에 눈치챈다는 점도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닥터 리는 희귀 혈액형을 지닌 아이를 구하기 위해 중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뒤진다. 늦은 밤 집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불은 켜지 않고 굳이 플래시를 들고 나서기도 한다.
영화는 스릴러라기보다 차라리 한국 관광 홍보 영화에 가까워 보인다. 알리스는 명동, 남대문 같은 명소를 찾아다니며 떡볶이를 먹고 카메라는 외국인 눈에 신기하게 보일 법한 한국의 풍경을 쉴 새 없이 담는다.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데 너무 긴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그나마 생기려던 궁금증이나 긴장감은 맥없이 실종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칸영화제에서까지 주목받은 감독이 어떤 구상을 가지고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가 가장 궁금해질 것 같다. 범죄·스릴러 영화라면 관객에게 최소한의 장르적 쾌감이라도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자극적인 소재와 어둡고 날카로운 음악만 쓴다고 해서 스릴이 마술처럼 생겨나진 않는다.
오는 30일 개봉. 상영시간 88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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