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물든 달항아리, 지워진 글자…글렌 라이곤 첫 한국 개인전

아모레퍼시픽 APMA 캐비닛서 '블랙 문'…익숙한 문법 뒤집어 문화적 비평

박의래

| 2026-08-07 11:43:16

▲ 글렌 라이곤의 검은 달항아리 [하우저앤워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글렌 라이곤 작 '스태틱 #6'(왼쪽)와 '리댁티드 #13' [하우저앤워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글렌 라이곤 작가 [하우저앤워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흰 달항아리가 검게 변했다.

둥글고 넉넉한 몸체에 은은한 백색을 머금은 일반적인 조선의 달항아리와 달리, 미국의 개념미술가 글렌 라이곤(66)의 달항아리는 숯빛을 띤다. 표면도 매끈하게 다듬지 않아 자연스럽게 일그러지고 비대칭적인 형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검은 달항아리는 라이곤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말하기 어려운 것, 명확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투명하게 남아 있는 것들'이라는 주제의식을 표현했다.

라이곤의 한국 첫 개인전 '블랙 문'(Black Moons)이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APMA 캐비닛에서 오는 14일부터 열린다. 검은 달항아리 연작과 함께 작가의 대표적인 텍스트 회화 연작 '스태틱'(Static), '리댁티드'(Redacted)를 선보인다.

검은 달항아리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도예가와 협업한 작품이다.

점토와 구워내는 온도를 달리하며 오랜 실험 끝에 깊고 짙은 숯빛을 구현했다. 표면은 매끈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고 즉흥적인 실루엣을 남겼다.

인위적인 완벽함보다 자연스러움과 비대칭성을 중시했던 조선백자의 미감을 계승하면서도 전통 도자의 익숙한 문법을 뒤집었다. 이렇게 탄생한 검은 달항아리는 전통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적 비평을 담아내는 매개체가 된다.

'스태틱' 연작은 미국 작가 제임스 볼드윈의 1953년 에세이 '마을의 이방인'을 바탕으로 한다.

라이곤은 젯소를 칠한 화면에 흰색 오일 스틱으로 볼드윈의 글을 새긴 뒤 검은색 안료로 다시 덮는다. 문장은 점차 읽을 수 없게 되고, 화면은 신호를 잃은 아날로그 TV의 흑백 모래알 화면처럼 변한다.

이를 통해 라이곤은 언어가 복잡한 현실과 문화적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글자를 지워버리는 것은 결국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리댁티드'에서는 지우기가 더 노골적이다. 작가는 텍스트 위에 제도적 검열과 역사적 말소를 상징하는 기호 'X'를 반복적으로 그어 글자를 지운다.

읽을 수 없게 된 문장은 촘촘한 리듬을 가진 추상적 이미지로 변한다. 글자는 지워졌지만 무언가가 지워졌다는 사실은 드러난다.

라이곤은 지우는 작업을 통해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무엇을 읽을 수 있는가', 나아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라이곤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현대 회화와 개념미술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작업을 해왔다.

1997년과 2015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그의 작품이 소개됐으며 미국 아스펜 미술관, 영국 피츠윌리엄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는 9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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