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끝에 찾은 '살아야 할 이유'…신화로 그린 여성 서사

국립극단 연극 '역행기'…상징적 무대 연출·독창적 신체 언어 눈길

조윤희

| 2026-09-04 11:40:31

▲ 국립극단 연극 '역행기'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국립극단 연극 '역행기'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국립극단 연극 '역행기'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조윤희 기자 = "없네. 없어. 살아야 할 이유."

극이 시작되자마자 주인공 '인안나'가 툭하고 던진 혼잣말이다. 희망이 점차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벽한 절망 한가운데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고대 수메르 신화 속 인안나 여신의 지하 하강 서사를 바탕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모진 세월을 살아낸 여성들의 삶을 엮어낸 국립극단 연극 '역행기'가 지난 3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했다.

2024년 15년 만에 재개된 국립극단 창작희곡공모에서 303편의 경쟁작을 제치고 대상을 받은 김주희 작가의 작품으로, 삶의 끈을 놓으려던 인안나가 집이 무너지면서 바닥 아래 지하 세계로 떨어지며 시작된다.

그곳에서 인안나는 잊히고 상처받은 가족들을 만난다.

몸에 뿌리가 자란 할머니 '주머니', 망치를 짊어진 채 네 발로 서 있는 언니 '핑크', 돌과 한 몸이 되어가는 '돌덩이', 그리고 깊은 곳에서 깨어난 어머니 '에레쉬'까지. 인물들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잊혀진 과거의 실마리를 서서히 풀어간다.

최소한의 무대 장치 속에서 인안나의 끝없는 추락을 시각화한 무대 연출이 단연 돋보였다.

실제로 무대가 바닥 아래로 무너져 내릴 수 없는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거칠고 어두운 질감의 바닥판 전체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고 기울이는 방식을 택했다.

공중에 떠오른 바닥판과 그 아래 드러난 어두운 틈새, 천장의 뚫린 구멍은 주인공이 끝없이 깊은 지하 세계로 추락하고 있음을 입체적으로 보여줬다.

다만 작품 전반에 겹겹이 쌓여있는 상징은 관객에게 다소 친절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배우들의 독창적인 신체 언어는 관객이 능동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다.

배우들은 대사를 읊을 때나 정적 속에서도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며 인물의 심리와 내면을 표현했다.

인물의 행동 방식과 이유를 분석하는 '라반 움직임 분석법'을 도입한 이 연출은 관객에게 원시적이면서도 낯선 자극을 주며, 움직임이 지닌 숨은 의미가 무엇일지 내내 생각하게 했다.

20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과 다소 묵직한 템포, 낯선 무대 문법 탓에 1막이 끝난 뒤엔 극이 어렵다는 반응도 이어졌다.

하지만 인물 간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2막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어려움은 해소되어간다.

캐릭터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적·사회적 맥락도 깊이가 있다.

김주희 작가는 공연 전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주머니'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세대, '에레쉬'는 산업화와 노동 문제 속 불평등을 경험한 세대, '핑크'는 성별 분업화된 일에 진열되듯 종사해야 했던 여성, '돌덩이'는 어린이와 기구한 전쟁 서사를 담았다"며 "인안나는 전쟁이 과열되는 근미래에 배제된 개인의 삶에 대한 고민이 확장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상징이 쌓여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각 인물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여성들의 서사는 명확하다.

극 후반부, 인안나가 지하 세계 인물들과 이별하는 장면은 절망에서의 단순한 탈출이 아닌 묘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인안나의 마음에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생겨남과 동시에, 자신이 이 세상에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이 전달된다.

헤어짐 속에서도 그들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연대감이 가슴 깊이 남는다.

"인안나는 나를 붙들고 아주 많은 말들을 적기 시작했어. 살아야 할 이유들을."

이야기의 화자인 서판 둡이 마지막 순간 남긴 이 대사처럼, 연극은 가장 어두운 절망의 바닥에서 다시 삶의 이유를 적어 내려가는 여정을 보여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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