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근
| 2021-10-08 11:38:19
매혹하는 음악, 설득력 약한 연출…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나치가 어떤 폭력집단이었으며 유대인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가를 확실하게 알려주려는 연출가의 '계몽 의지'가 너무 강했던 탓일까? 작품 배경을 3천 년 전 중동지역에서 1938년 나치 시대 독일로 옮겨놓은 국립오페라단의 '삼손과 데릴라'는 지난 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공연에서 기대만큼 설득력 있는 연출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연출가 아흐노 베흐나흐가 몇몇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의 '삼손과 데릴라'는 관객이 지루해하기 쉬운 작품이다. 생상스의 화성이나 오라토리오적인 형식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이 독특한 음악에 매혹되는 대신 극적 긴장이 약한 드라마에 지루함을 느끼기 쉽다.
그런 점에서 연출가는 기본적으로 현명한 선택을 했다. 시공간적 배경을 바꿔 원작 드라마에 결여된 긴장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치 친위대와 돌격대가 유대인 회당과 상점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사건이 배경이라면 관객의 몰입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관객의 기대를 모았던 이 설정은 실제 무대 위에 구현되자 약간 무리한 설정이었음이 드러났다. 각각 다른 신을 섬기는 히브리와 블레셋이라는 두 고대 민족의 충돌을 나치의 인종 말살 정책에 대입한 것이 무리였다. 히브리와 블레셋 간의 분쟁은 어느 시대에나 흔한 민족 혹은 종족 간의 불화지만, 파시즘의 폭력은 단순히 두 민족 또는 두 정치 세력 간의 분쟁으로 취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현대사의 치명상이라 할 수 있다.
레지테아터(연출가가 의도에 따라 시공간적 설정을 바꾸는 극)를 시도하는 연출가는 자신이 바꿔놓은 배경에서 극의 마지막까지 모든 아귀를 맞춰가야 하는데, 기본 설정에 무리가 있다 보니 현실성이 없거나 음악이 낭비되는 듯한 장면이 이따금 보였다.
1막에서 삼손 및 히브리인들과 싸우다가 맥없이 패하는 아비멜렉 장면이 그 예다. 대신 1943년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봉기를 배경으로 했다면 오히려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연출가가 오페라 스타일의 연기 대신 자연스럽고 치밀한 연극적 연기를 출연진에게 요청하고, 합창단을 적극적으로 참여시켜 군중 장면을 연출하고, 또 연기 디테일의 완성도를 위해 최선을 다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음악적인 면에서는 생상스의 유니크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합창음악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세바스티안 랑 레싱은 이따금 음악을 멈추고 짧은 휴지를 두거나 저음 현악기로만 연주하게 하는 생상스의 독특한 음악적 순간들을 매혹적으로 구현했다.
또 그와 대비되는 유려한 멜로디의 순간들을 오케스트라는 상대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연주했다. 3막 바카날의 이국적인 색채감 또한 귀를 매혹했고, 음향의 전반적인 밸런스도 적절했다.
연출가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주문에 몸을 던져 연기하며 매 순간 무대를 역동적으로 채운 노이오페라코러스는 이번 공연에서 최고의 역할을 했다. 무대 위에서 지휘자에게 등을 돌리고 노래해야 할 때나 무대 밖에서 노래할 때도 이들의 합창은 언제나 명료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베르디의 오텔로 역으로 유명한 리투아니아 테너 크리스티안 베네딕트는 호쾌한 발성과 풍성한 성량에 있어 삼손에 적역이었다. 다만 성경의 안하무인 삼손과는 다른 생상스 오페라 속 삼손의 사색적이고 감성적인 면모를 좀 더 섬세하게 그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의 데릴라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고음에서 날카롭고 강렬하며 저음에서 부드럽고 깊이 있는 음색으로 객석을 압도한 이아경은 무대 위에서 쉴 새 없이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가창의 정교함을 놓치지 않았다.
다곤의 대사제 역을 맡은 바리톤 사무엘 윤은 나치 유니폼에 어울리는 포스와 탄탄한 가창으로 특유의 무대 장악력을 보여줬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유사한 냉소 어린 분노의 표현이 배역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테너 국윤종(삼손)·메조소프라노 김정미(데릴라)가 크리스티안 베네틱트·이아경과 번갈아 출연한다. 공연은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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