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래
| 2026-03-23 09:47:15
병뚜껑으로 직조한 아프리카 대지…엘 아나추이 신작 공개
화이트 큐브 서울서 개인전 '루보'…병뚜껑 신작 4점 선보여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가나에서 태어나 나이지리아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작가 엘 아나추이(82)는 1990년대 길을 걷던 중 버려진 병뚜껑이 가득 담긴 자루를 발견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잔해와 같은 병뚜껑에서 새로운 조각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찾았고, 이를 엮어 아프리카의 원초적 대지를 닮은 거대한 직물 형태의 조각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왔다.
폐기물과 자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작업을 선보이는 아프리카 미술 거장 아나추이의 개인전 '루보'(LuwVor)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루보는 가나 에웨족 언어로 영혼이라는 의미다.
전시에는 최근 제작한 대형 설치 연작 '루보 1∼4', 총 4점이 출품됐다.
아나추이는 금속 병뚜껑을 펼치거나 자르고, 구리선으로 엮어 직조하듯 연결한다. 병뚜껑 외에도 고리나 병목을 감싸는 금속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거대한 직물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재료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장인의 노동을 거치면서 산업 폐기물은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조각으로 재탄생한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루보 2'다. 가로 303㎝, 세로 270㎝ 크기로 벽이 아닌 공중에 매달아 전시됐다.
관람자는 작품의 앞뒤를 구분하지 않고 둘러볼 수 있다. 이는 하나의 면이 다른 면에 종속되지 않는 작가의 '비고정적 형태' 개념을 보여준다.
작품 상단은 병뚜껑을 촘촘히 엮어 구성됐다. 한 면은 은빛 단색의 평면을 이루고, 반대편은 브랜드가 인쇄된 흑색, 갈색, 황색, 적색이 어우러지며 아프리카 대지를 연상시키는 색채 대비를 보여준다.
하단은 병뚜껑의 고리만을 연결해 만든 구조로,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 구멍 사이로 반대편 풍경이 비치고 조명이 통과하면서, 작품은 하나의 물질적 덩어리를 넘어 빛과 공기가 흐르는 반투명한 직조로 확장된다.
아나추이는 1944년 가나 출생으로 가나 콰메 은크루마 과학기술대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1975년 나이지리아로 이주해 은수카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일하며 작업을 이어왔다.
점토, 목재, 금속 등 다양한 재료를 탐구해온 그는 1990년대 후반 병뚜껑을 활용한 대형 설치 작업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평생 공로 부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2023년에는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현대자동차 커미션으로 선보인 설치작 '비하인드 더 레드 문'(Behind the Red Moon)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그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현대미술관(MoMA), 영국 테이트 모던, 파리 퐁피두 센터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4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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