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여진정벌, 국익·영향력 확대가 목적…정당성 없었다"

이규철 성신여대 교수 주장…"원인으로 알려진 여진 침입 피해 경미"

박상현

| 2022-03-07 11:27:44

▲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세종 여진정벌, 국익·영향력 확대가 목적…정당성 없었다"

이규철 성신여대 교수 주장…"원인으로 알려진 여진 침입 피해 경미"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재위 1418∼1450)이 1433년 지시한 여진 정벌 배경은 그간 알려진 여진 침입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국익과 영향력 확대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7일 학계에 따르면 조선시대사 연구자인 이규철 성신여대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최신호에 발표한 글에서 세종대 초기에 여진 침입이 잦지 않았고 조선이 본 피해도 매우 경미했기에 조선의 대외정벌은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1432년 12월 여진이 평안도 여연을 침입했을 때 병력이 400여 명이었으나, 세종은 영토 확장을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1만5천 명을 동원해 여진을 정벌했다고 강조했다. 또 세종이 정벌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특정 인물을 응징 대상으로 정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세종 4년인 1422년 여진이 여러 차례 조선을 공격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병력이 많지 않았고, 조선 조정이 여진 침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짚었다. 이어 1424년 여진 병사 100여 명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조선군에 격퇴당한 사실도 소개했다. 이후 한동안 여진 침입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여진 침입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세종은 1430년 병조판서 조계생이 여연의 성보(城堡·성 밖에 만든 요새)를 수리하겠다고 하자 "근래 변경에 우환이 없다"며 보류하도록 했다.

이 교수는 여진 정벌의 직접적 계기가 된 1432년 12월 여진 침입 때에도 피해가 크지 않았고, 신하들이 출병을 반대했다고 짚었다.

하지만 세종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여진 정벌을 결심했고, 침입과 관계없는 여진 인물인 이만주(李滿住)를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고 이 교수는 주장했다.

이 교수는 "조선과 이만주는 서로를 의식했지만 충돌이나 활동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며 "이만주는 1432년 여연 공격에 자신이 얽혀 있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조선에 먼저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하들이 여연 침입 주체를 이만주가 아닌 다른 세력으로 여겨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세종은 이만주가 '침입의 사주'일 수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 정벌을 정당화했다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세종은 여연 사건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자는 의견은 듣지 않고 오로지 이만주 세력을 힐책하고 제압하려는 의사를 계속 드러냈다"며 "여연을 침입한 세력의 정체나 이전 침입 횟수, 조선의 피해 규모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만주 정벌 과정에서 세종은 명분과 행동의 정당성이 일치하지 않는 전형적 상황을 보였다"며 조선의 여진 정벌에는 주변 세력을 힘으로 제압하고 자신만의 논리로 재단한 세종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후대에 세종을 완벽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겨나면서 여진 정벌에서도 유교적 명분을 찾으려는 시각이 존재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세종 시대를 신화화하고, 한국사를 지나치게 피해자 관점에서 설명하는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세종을 필요 이상으로 비판할 필요는 없지만, 세종을 필요 이상으로 높일 필요도 없다"며 "좋은 군주가 했던 일이 모두 좋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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