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
| 2023-02-26 08:30:00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박준채 숨겨진 시 '제초소감' 발견
김정훈 교수, 일본 잡지 기고 준비하다 원고 노트 사이 쪽지 찾아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북풍(北風) 불고 눈보라 치는 세상(世相)/ 우슴도 눈물도 업는 짙은 장막(帳幕)의/ 이 「아포리아」를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불씨를 지핀 독립운동가 해촌(海村) 박준채(1914∼2001) 시인의 시가 우연한 기회로 추가 발굴됐다.
26일 전남과학대 김정훈 교수에 따르면 김 교수는 일본 '시와 사상'에 박 시인에 대한 기고를 준비하던 중 31편의 시가 적힌 원고 사이에서 쪽지 형태로 끼워진 시 '제초소감(除初小感)'을 발견했다.
◇ 6·25 전쟁 시기에도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
박 시인은 일본의 문방구에서 구매한 공책에 자필로 시를 정리했는데, 이 원고를 차남 형근 씨가 2010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기증했다.
김 교수의 검증으로 시 31편은 오롯이 공개됐다.
이런 인연으로 김 교수는 최근 일본 '시와 사상' 편집자로부터 박 시인의 '시인론' 집필을 부탁받았다.
김 교수는 그의 원고를 다시 하나하나 넘기며 살펴보다가 원고 사이에 낀 새로운 시를 찾았다.
'제초소감'이라는 제목의 시는 해방 후 5년이 지난 후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12월 31일에 청계장(淸溪莊)에서 작성됐다.
박 시인이 직접 글을 고쳐가며 원고를 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박 시인은 시에서 항일 학생운동 시기를 회고하며 '나라 업는 민족의 서름'를 되새겼다.
그리고 다 같이 힘차게 뭉칠 것을 호소하며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미래의 새 삶을 위해' 투쟁할 것을 외쳤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민족수난기인 6·25전쟁의 해에도 박 시인은 시 창작을 통해 광주학생운동을 돌이키고 민족의식을 불태웠다"며 "근심 어린 시선으로 현실을 주시하면서 겨레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이 드러난 시"라고 평가했다.
◇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박준채 '그는 누구인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만세 운동, 6·10만세 운동과 함께 국내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꼽힌다.
기폭제는 나주역 통학 열차 사건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학생들이 댕기 머리를 한 조선 여학생을 희롱하자 당시 광주 고보생이었던 박 시인은 주도적으로 일본 학생들에게 맞섰다.
김 교수는 제104주년 3·1절인 오는 3월 1일 발행 예정인 시와 사상에 박 시인과 그의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룬 글을 기고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 10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박 시인의 생가(남파고택)를 방문한 사실을 언급했다.
박 시인은 항일 학생운동의 불씨를 지핀 장본인이자 한일의 역사를 거론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상징적 존재라고 소개했다.
박 시인이 일본어로 쓴 '환상'이라는 시를 소개하며 조선 식민지 현실에 대한 허무감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또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에서 황민화 교육을 강화하며 조선의 병참 기지화를 노골적으로 강행하던 시기 박 시인이 쓴 '1937년의 제석(除夕)'과 '촌감(寸感)' 등 시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의미를 되새겼다.
김 교수는 "박준채는 일본제국주의의 권력이 조선 식민지정책을 강화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시기에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당사자다"며 "한일의 어두운 시대를 돌이키게 하고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비극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기하는 상징적 인물이다"고 평가했다.
아래는 이번에 새로 발굴된 '제초소감' 시의 전문이다.
◇ 제초소감(除初小感)
북풍(北風) 불고 눈보라 치는 세상(世相)
우슴도 눈물도 업는 짙은 장막(帳幕)의
이 「아포리아」를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나라 업는 민족(民族)의 서름이여
님 업는 이 땅! 이 겨레!
다 같이 힘차게 뭉처라! 굳세게!
정의(正義)는 승리(勝利)하나니
찬달 빛이는 창(窓)박으로
백팔(百八)의 종소리 사라지리라
이 강산(江山)에 새봄이 오면
썩은 고목(枯木)도 다시 싹이 트나니
배달의 아들 딸들아
함마를 억게에 힘차게 매고 싸우라!
일하라! 배우라!
미래(未來)의 새 삶을 위(爲)하여!
멀니서 들려오는 희망(希望)의 종소리
이땅의 겨레에게 자유(自由)를 주라
영원한 행복(幸福)을!
1950년 12월 31일 밤 청계장(淸溪莊)에서 해촌(海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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