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중인 세계, 자유·희망 향한 촛불의 합창…오페라 '나부코'

서울시오페라단 공연…바빌론 유수와 유대인의 포로살이 극적 묘사
대규모 합창으로 강한 인상…체스판 말·폭포 등 소품도 눈길

최주성

| 2026-04-10 10:34:54

▲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공연사진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나부코' 중 옥좌에 선 나부코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나부코' 중 아버지의 옥좌를 갈망하는 아비가엘레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나부코' 공연사진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쟁중인 세계, 자유·희망 향한 촛불의 합창…오페라 '나부코'

서울시오페라단 공연…바빌론 유수와 유대인의 포로살이 극적 묘사

대규모 합창으로 강한 인상…체스판 말·폭포 등 소품도 눈길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베르디의 '나부코'를 유난히 넓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린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라는 명곡으로 인기 있는 이 오페라를 지난 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서울시오페라단(단장 박혜진) 프로덕션으로 만났다.

오페라 기획 단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미국과 이란의 전쟁 때문에, 이 전쟁을 불러온 이스라엘이 과거에 겪은 억압과 해방의 역사를 무대 위에 바라보는 심경은 착잡했다. 물론 베르디는 이 역사에 이탈리아의 상황을 빗대긴 했다.

아득한 기원전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공으로 포로 생활을 하게 된 '바빌론 유수'라는 사건이 21세기 오페라 관객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더구나 기록된 역사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아시리아 왕 나부코, 즉 히브리 민족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킨 느부카드넷자르 2세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로 어떻게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연출가의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장서문의 연출은 전통적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극적 장치들을 통해 아시리아 제국의 호전성과 잔혹성을 부각함으로써 피억압자 이스라엘의 고통을 극대화하려 했다.

강렬한 공포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나부코의 예루살렘 성전 침공 장면에서 아시리아 전사들 역할을 20명의 무용수에게 맡겨 위협적인 군무를 보여준 것은 음악의 리듬과도 일치하는 효과적인 기획이었다.

무용수가 분한 사나운 늑대개 두 마리를 끌고 등장한 나부코는 극 초반부터 오만하고 잔인한 군주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피지배자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서술한 구약성경은 아시리아를 극도로 잔혹한 제국으로 묘사했으며, 실제 아시리아의 공식 비문과 부조에도 포로를 산 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말뚝에 꿰거나 잘린 머리통을 쌓아 올리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연출가는 이런 예를 그대로 무대 위에 옮겨놓았다.

나부코의 큰딸 아비가일레가 아버지의 옥좌를 찬탈한 뒤 펼쳐지는 글래디에이터 경기는 아마도 역사적 고증이 아닌 연출가의 상상력일 것이다. 아시리아에서 전사는 가치 있는 군사적 자산이었기에, 훈련된 전사를 구경거리로 소모하는 방식은 제국 운영 논리에 부합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변미라의 의상디자인은 아시리아 부조에 나타난 당대 전사들의 튜닉과 벨트, 부츠 등에 게임 캐릭터 같은 세련미를 더해 설득력 있는 재현을 해냈다.

무대 좌우에 중첩된 바위 구조물을 세운 김현정의 무대디자인은 넓은 무대의 양옆을 좁히는 효과를 가져왔다. 인간의 삶을 게임에 빗대 체스판의 말들을 무대에 세웠고, 운명을 상징하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인물들 머리 위에 설치했다. 바빌론 궁전의 옥좌 뒤 공중정원은 영상디자이너 장수호가 구현한 폭포 등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했다.

이든이 지휘한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은 서곡부터 박진감 넘치는 베르디를 들려줬다. 이든은 무대 위 합창단 및 솔로 성악가들과 시종 함께 노래하고 교감하며 섬세하게 음악을 이끌었다.

베르디의 전기 작품인 '맥베스'와 마찬가지로 '나부코' 역시 무거운 주제에 비해 음악이 놀랍도록 밝고 가벼운 편인데, 오케스트라는 바로 이런 경쾌한 특성을 잘 살렸다. 다만 4막에서는 긴장이 다소 느슨해진 듯 합이 정교하게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날 가장 돋보인 주역은 단연 아비가일레 역의 소프라노 서선영이었다. 분노와 회한의 깊이 있는 표현력과 대극장을 관통하는 선명한 고음은 관객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나부코 역의 바리톤 양준모는 전반적으로 훌륭한 가창을 들려줬지만, 교만-징벌-회개-구원이라는 극과 극의 감정적 온도 차를 구현하는 데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이스마엘레 역의 테너 이승묵은 명징하고 서정적이며 호소력 있는 가창, 배역에 적합한 연기를 보여줬다. 나부코의 둘째 딸 페네나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선정 역시 매혹적인 가창으로 배역을 소화했다. 다만 단호하고 죽음 앞에 당당한 페네나의 극 중 이미지와는 달리 두려움에 떠는 소심한 태도를 종종 보였는데 이는 아마도 연출가의 해석이었을 듯하다.

60명에 달하는 위너오페라합창단은 풍성한 음량과 치밀한 리듬 감각, 적극적인 연기로 이번 공연의 수준을 더욱 높였고, 3막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역시 60명에 가까운 시민합창단(서울시여성콘서트합창단, 연세여아름합창단, 홍익합창단)이 금빛 베일을 쓰고 촛불을 든 모습으로 객석 통로를 걸어가며 이 합창에 동참해, 전 세계 억압 받는 사람들의 자유와 희망을 노래했다.

공연은 더블캐스트로 오는 12일까지 열린다.

rosina03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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