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창
| 2026-05-06 08:01:00
[공원이야기] 용산에 찾아온 봄…용산가족공원을 가다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용산에 찾아온 봄을 마중했다.
오랜 금단의 땅에 핀 진달래가 슬프지 않고, 그 위에 걸린 한 뼘 파란 하늘이 시리지 않고, 높은 담장 위 철조망도 이젠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용산가족공원의 봄은 꽃잎과 눈 부신 빛으로 가득했다.
이촌역에서 내렸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그 앞마당을 통해 용산가족공원을 향해 가는 길은 모든 게 의미심장하다.
거대한 성벽의 통창처럼 박물관 한가운데 시원하게 뚫린 공간 너머로 남산이 보인다. 산등성이의 부드러운 곡선이 또렷하다.
건물 앞 연못에 비친 세상을 보고는 물에 비친 내 모습이 궁금해졌다. 연못 이름이 '거울못'이다. 공원은 들어가기도 전에 나를 돌아보라고 채근한다.
걸을수록 봄꽃 나무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남계원 칠층석탑과 홍제동 오층석탑은 여기가 아직 박물관 정원임을 일깨운다.
이어 나타난 미르폭포. 미르는 용을 뜻하는 옛말이다. 용산이라는 지명에서 따온 것임을 직감했다.
◇ 슬프도록 짧아 더 아름답다
용산가족공원 문턱에 들어서면 곧바로 공원 연못이 펼쳐진다.
물을 중심으로 부정형의 둥근 산책로가 가지런히 길을 내고 주변엔 늘 물과 가까운 능수버들이 한여름인 양 한껏 늘어졌다.
돌로 쌓은 물과 흙의 경계 위엔 소나무들 모습이 단정하다.
그리고 그 푸른 나무들을 빙 둘러싼 흰 꽃잎의 물결. 슬프도록 짧게 피어 더 아름다운 벚꽃 군락에 눈이 부셨다.
물 위로는 분수가 만든 물꽃이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연못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다.
정오가 다가오면서 사람들이 많아졌다. 잔디 위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바게트와 와인을 즐기는 모습이 서양 유화를 보는 것 같다.
야외 실습 나온 유치원생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왔다. 지금 여기가 바로 '용산의 봄'이다.
◇ 문신처럼 새겨진 역사
약 7만6천㎡(2만3천평) 크기의 공원에는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세 군데 있다. 제1광장과 제2광장, 태극기광장. 이 중 제1,2광장에는 잔디가 깔려 있다.
이 공원이 직전에 미군 골프장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이곳 용산(龍山) 땅엔 질곡과 오욕의 역사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용산은 서울까지 비교적 평탄한 길로 이어져 있다는 점 때문에 교통의 요지이자 물류의 집산지로서 가치가 높았다.
그런 이유로 고려 말에는 몽골군의 병참기지,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보급기지가 설치됐다.
임오군란(1882년) 때는 청나라 군사가 점유했고 러일전쟁(1904년)이 끝난 뒤부터 해방 전까지 일본인들이 군 시설 및 거주지로 사용했다.
일본군은 철수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용산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용지로 정식 임대됐다.
유엔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도 차례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용산은 '서울 속의 미국'이 됐다.
서울 한복판의 이 넓은 노른자위 땅은 늘 서울이면서도 서울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다.
한미 양국은 1990년 기지 이전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이듬해 기지 내에 있던 골프장이 반환됐다.
이곳에 용산가족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섰다.
골프장의 잔디는 공원 잔디가 됐고 연못과 광장, 언덕으로 이뤄진 소중한 시민공원이 탄생했다. 용산가족공원은 용산공원화의 첫발이다.
◇ 이태리포플러 두 그루
연못 끝에 서서 북쪽 풍광을 바라본다. 이 공원 최고의 포토존일지 모르겠다.
오른쪽 물가에 우뚝 선 키 큰 이태리포플러 두 그루가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두 나무는 옆에서 보면 한 그루처럼 보인다. 동네 주민들이 쌍둥이 나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한여름에는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고 한다.
연못 한쪽엔 거인을 연상시키는 대형 갈색 철제 조각이 서 있다. 최평곤 작가의 작품 '오늘'(Present)이다. 연못 주변과 제1광장에서도 볼 수 있는 랜드마크다. '어제'를 잃은 용산에 가장 중요한 건 '오늘'이 아닐까.
연못 동쪽에는 장미정원이 있고 그 위로 제1광장의 잔디가 펼쳐져 있다. 원래 모두 잔디밭이었는데 작년에 이곳의 절반 정도를 장미정원으로 조성했다.
정원 안에는 프랑스 작가 에드워드 소테의 조각 '손으로 만든 손'이 있다. 흑기와와 철재로 만든 이 거대한 검은 손이 뭘 상징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상과 느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공원에는 7개 국가(한국·프랑스·스위스·독일·영국·미국·캐나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작품 9점이 전시돼 있다.
◇ 리기테다소나무와 참개구리
놀이터와 벤치를 지나 나지막한 언덕을 넘는다. 다시 탁 트인 공간이 나온다. 잔디가 심긴 제2광장이다.
떨어진 작은 연분홍 꽃잎이 바닥에 빽빽하다. 박주연 용산가족공원 해설사는 "살구꽃이 예쁘게 폈는데 어젯밤 바람에 꽃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며 "공원에 살구나무가 많다"고 했다.
박 해설사를 따라다니며 공원의 나무들을 살펴봤다.
자귀나무, 산수유, 칠엽수, 엄나무, 벽오동 나무, 방크스소나무, 박태기 등이 한두그루씩 구색을 갖췄고 계수나무는 암그루와 수그루가 나란히 막 꽃을 피우고 있다.
제2광장 끝에는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의 교잡종으로 흔히 보기 어려운 리기테다소나무도 서 있다. 솔잎이 보통 소나무의 두 배쯤 길고 솔방울도 커서 한눈에 개성이 드러나는 특이한 소나무다.
제2광장 한편에 생태습지가 있는데, 참개구리의 합창 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려온다.
박 해설사는 "개구리 소리가 예년보다 한 달가량이나 일찍 들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곳 습지는 맹꽁이 서식지다. 장마철에는 맹꽁이들의 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공원엔 꾀꼬리, 직박구리, 대륙검은지빠귀, 딱따구리도 살고 있다.
◇ 용산은 미완성
제2광장에서 느티나무 군락을 지나 공원을 나오니 바투 붙은 박물관 정원에 보신각종이 있다. 이 종이 바로 보물 제2호인 '진짜' 보신각종이다.
종로에 있는 보신각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할 수 없게 되자 그곳엔 1985년 복제종을 만들어 걸었고, 진품은 이곳에 와 있다.
공원과 박물관 정원을 함께 걸으며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으로 느껴졌다. 공원과 박물관은 개방된 용산이 허락한 최고의 단짝이다.
공원을 걸으며 상상한다. 거기엔 슬픈 역사에 대한 낭만적 상상력이 동원된다. 빼앗긴 땅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도 가져본다.
지난 역사가 떠오르지 않으면 또 어떤가. 이곳 용산엔 부재(不在)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민초들의 삶이 녹아 있다.
거기엔 오늘의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여전히 갈 길은 멀고, 용산은 아직 미완성이다.
※ 참고 자료
1. 용산공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2019, 염복규)
2. 용산가족공원 조성 과정의 특성과 의미(2023, 최혜영 등)
3. 공원의 위로(배정한, 2023)
4. '서울의 공원' 홈페이지(https://parks.seoul.go.kr/template/sub/yongsan.do)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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