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여행의 향기…축령산 편백숲

이동경

| 2026-08-13 09:57:58

▲ 축령산 전망대[사진/임헌정 기자]
▲ 임종국 선생 수목장[사진/임헌정 기자]
▲ 축령산 전경[사진/임헌정 기자]
▲ 장성호 전경[사진/임헌정 기자]
▲ 변동해 선생[사진/이동경 기자]
▲ 금곡 영화마을[사진/임헌정 기자]
▲ 쌍계루[사진/임헌정 기자]

(장성=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여행은 종종 향기로 기억된다. 축령산 편백숲은 청량한 향기를 내뿜었고, 고요한 백양사 법당의 향 내음은 사색의 시간을 내줬다.

◇ 사람이 만든 숲

2010년 국립 치유의 숲으로 지정된 전남 장성군 축령산(해발 621m)은 국내 최대 규모의 편백·삼나무 인공조림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장성군 서삼면과 북일면 일대에 펼쳐진 축령산의 편백숲은 자연이 저절로 만든 숲이 아니다. 누군가 한 그루 한그루 심어 올린 사람의 숲이다.

시작은 한 사람의 결심에서 비롯됐다. 독림가 춘원 임종국(1915~1987) 선생은 일제 강점기의 무분별한 벌목과 6·25전쟁의 피해로 황폐해진 이 산에 1950년대 중반부터 사재를 들여 조림을 시작했다. 20여년에 걸쳐 편백과 삼나무, 낙엽송 등 240㏊의 면적에 300만 그루에 달하는 나무를 심었다.

반생을 들여 민둥산을 숲으로 바꾼 것이다. 편백숲으로 향하는 길은 모암마을과 대덕마을 등 주변 4개 마을에 일곱 군데다. 북일면 금곡 주차장 쪽에서 승용차로 중앙 임도를 따라 올라갔다. 숲의 향기를 빨리 느끼고 싶은 성급한 마음에 에어컨 바람을 마다하고 창문을 열었다. 편백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 느티나무 수목장

20여분을 올라가 우물터 근처에 내리자 숲은 더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초여름 한낮인데도 편백과 삼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은 서늘하다. 짙은 녹음 사이로 뻗은 나무들이 7월 초 따가운 햇살을 걸러냈다. 깊이 1.5m의 우물은 숲을 조성할 때부터 있었다. 60년이 넘은 셈이다.

비가 많이 오나 적게 오나 우물 수위는 늘 변동이 없다고 숲해설가가 말한다. 우물의 은혜를 입은 듯 수령이 수십 년은 돼 보이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주변에 서 있다. 옥잠화도 피어있고 가을이면 새빨개질 에기단풍도 여러 그루가 눈에 띈다.

우물터 바로 밑 느티나무 아래에 임종국 선생이 수목장으로 안장돼있다. 천근성 뿌리를 가진 편백이나 삼나무는 독립적으로 심으면 쉽게 무너지기 때문에 뿌리를 깊게 박는 직근성인 느티나무가 쓰였다. 임종국 선생은 1987년 전북 순창의 선영에 안치됐으나 산림청의 권유로 2005년 이 숲에 이장됐다. 수목장으로는 국내에서 2번째였다. 임종국 선생의 부인 김영금 여사도 대여섯발짝 아래쪽 상수리나무 밑에 안장돼 있다. 여사는 남편과 합장하면 나무가 죽을 수 있다고 따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 편백향과 피톤치드의 향연

부부의 수목장 인근에 있는 전망대로 향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철 구조물로 이뤄진 전망대 끝에 다다르면 비로소 이 숲의 규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푸른 파도처럼 겹치는 능선을 따라 짙푸르게 뻗은 편백과 삼나무 군락이 마치 거대한 융단처럼 발아래 펼쳐진다. 숲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전망대에서 서서 비로소 20~30m에 달하는 나무들의 키를 가늠할 수 있었다.

테마숲 가운데 미로의 숲을 지나 국립장성숲체원 산림치유센터까지 가는 2km 안팎의 데크길은 축령산 숲길의 백미로 꼽힌다. 데크길은 '갈 지'(之)자 형태로 이어진다. 피톤치드와 편백 향의 향연을 음미하며 천천히 걷는 곳이다.

편백 향을 피톤치드 향으로 착각하는 일반인도 없지 않다. 피톤치드는 향이 없지만 휘발성이 있다. 무더운 날씨에 방출량이 더 많다고 하니, 지금이 제격이다. 숲내음숲은 이름 그대로 편백 특유의 향이 더욱 짙다. 이 숲을 지나 산림치유센터로 가는 길에 갈 지자의 데크길을 또 만끽한다. 숲해설가는 마치 누구한테 쫓기듯 바삐 걷지 말기를 자주 당부한다. 숲이 내뿜는 공기를 뱃속 깊은 곳까지 받아들이면서 걸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축령산에는 9개의 테마숲과 3곳의 데크길 코스가 있다. 임도와 데크길을 교차하면서 걷는 방법이 좋다.

◇ 장성호, 또 다른 데크길

우물터 삼거리로 돌아오는 길에 제법 모양이 이쁜 길이 있어 물어보니, '태백산맥', '쌍화점' 등 영화를 찍은 곳이었다. 유한킴벌리의 저 유명한 숲 광고 촬영 장소도 이곳이었다. 편백의 향을 온몸에 간직하고 숲을 내려와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장성호로 향했다.

장성호는 영산강 지류인 황룡강 상류계에 있는 인공호수다. 데크길이 아쉬워 또 다른 데크길을 찾았다고 해야 할까. 수변에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명물인 옐로우 출렁다리까지 3km를 걷는 코스는 편백숲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수위가 다소 낮았지만, 풍성한 수량이 출렁다리처럼 물결칠 때는 걷는 기분이 더 풍족해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축령산 산신령과 만나다

차를 돌려 축령산 기슭에 있는 청담(靑潭) 변동해(72) 선생의 세심원(洗心院)을 5년 만에 찾았다. 마음을 씻는 곳이라는 뜻의 세심원은 1999년 변 선생이 장성과 전북 고창의 경계에 있는 금곡마을에 버려진 움막을 편백과 황토를 이용해 고쳐 만든 곳이다. 그는 여러 개의 열쇠를 만들어 마음 수행이 필요한 이들에게 세심원을 20년간 무료로 개방했다.

'축령산 산신령', '세심원 지기'라 불리는 그는 장성군청 말단 공무원 출신이다. 오대산 오두막에서 법정스님이 쓰던 빗자루에서 '무소유'에 관한 영감을 받아 전국 고택을 돌며 대나무 가지로 200개의 빗자루를 만들어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2017년에는 축령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순동으로 된 빗자루 모양의 조형물을 세워 '세심비'로 명명했다.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내듯 탐욕을 떨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자는 것이 그의 인생 2막 삶의 철학이다. 반갑게 맞아주며 그가 꺼낸 편백 나무 막걸리로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그가 운영하는 펜션 '휴림'의 하룻밤은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은 기자에게 더없이 좋은 숙면의 시간이었다. 황토와 편백으로 지어진 아담한 방은 숨쉬기 편한 밤을 선사했다.

◇ 초록이 둘러싼 쌍계루, 고요한 백양사

다음날 아침 백양사로 향하면서 세심원에 인접한 금곡영화마을을 잠깐 들렀다. 1950~1960년대 마을 분위기를 간직한 이곳은 '태맥산맥', '내 마음의 풍금'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한 곳이다. 영화 세트장 등을 기대하기보다는 시골 돌담길 등 정감 있는 풍경을 보면서 어릴 적 추억에 잠기는 곳이다.

백양사 입구 쌍계루 앞 연못은 그 초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쌍계루에 오르니 애기단풍 가지 한 개가 누각의 한 귀퉁이에 걸쳐있다. 가을을 미리 알리려는 듯 발그스레 물든 가지 하나가 있어 한참 동안 눈길이 갔다. 지금은 연못을 둘러싼 애기단풍이 푸른 신록을 품고 있지만, 가을이면 이 자리가 어떤 빛으로 채워질지 자연스레 그려진다.

쌍계루와 백학봉을 배경으로 붉게 물든 단풍이 연못 수면에 비치는 풍경은 달력의 가을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이 연못이 몇 달 뒤면 전국의 사진 애호가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전날 밤의 고요함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 풍경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백양사 경내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법당 어디에선가 피어나는 향 내음이 코를 스친다. 짧은 사색에 잠기며 향기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8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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