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지철
| 2026-09-19 08:37:00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민 해녀가 "호오이" 숨비소리를 내뱉는다.
둥근 테왁에 몸을 기대 숨을 고른 것도 잠시.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빗창으로 바위에 붙은 전복을 떼어내고 잡은 해산물은 테왁 아래 망사리에 담는다.
산소통 없이 한 번의 호흡으로 바다를 오가는 제주해녀에게 물옷과 테왁, 빗창 같은 물질 도구는 거친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랜 세월 궁리해 만들어낸 삶의 지혜다.
2016년 11월 30일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올해로 10년.
제9회 해녀의 날과 제19회 제주해녀축제를 맞아 해녀의 물질 도구에 담긴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 유배객 놀라게 한 알몸 물질…물옷 거쳐 고무옷으로
지금은 고무옷을 입고 바다에 들어가지만 해녀들이 처음부터 물옷을 갖춰 입었던 것은 아니다.
옛 제주에서는 해녀들이 알몸으로 바다에 들어가 낫으로 전복과 미역 등을 채취했고 남자들도 함께 물질했다.
이를 막으려는 금지령도 여러 차례 내려졌다.
고려 숙종 10년인 1105년 탐라군의 구당사로 부임한 윤응균은 해녀들의 나체 조업을 금했고, 조선 인조 때도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오랜 물질 풍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628년 제주에 유배 온 이건은 '제주풍토기'에 "잠녀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낫을 들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미역을 따고 나온다"며 남녀가 뒤섞여 일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70여년 뒤인 1702년 제작된 '탐라순력도'에는 지금의 제주시 용두암 인근에서 흰색 물옷을 입고 물질하는 해녀가 등장한다.
알몸으로 바다에 들던 해녀들이 언제부터 물옷을 일반적으로 입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기록과 그림을 보면 적어도 조선 후기에는 물옷을 입고 물질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전통 물옷은 아래에 입는 '물소중이'와 윗옷인 '물적삼', 머리에 두르는 '물수건'으로 이뤄졌다.
물소중이는 옆을 터 몸에 맞게 품을 조절할 수 있게 했고, 물적삼은 물의 저항을 줄이려고 소매통을 좁게 만들었다.
차가운 바다에서 몸을 보호해줄 장비가 없던 시절, 해녀들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작업복인 셈이다.
전통 물옷은 1970년대 초 일본에서 '고무옷'이라 불린 잠수복이 들어오면서 점차 자취를 감췄다.
고무옷은 해녀의 옷차림뿐 아니라 물질 방식까지 바꿨다.
30분∼1시간 남짓이던 작업 시간이 3∼5시간 이상으로 늘었고 더 깊은 바다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더 깊이, 더 오래 물속에 머물게 되면서 잠수병이라는 새로운 위험도 따라왔다.
2012년부터는 선박과 부딪치는 사고를 막기 위해 검은색 대신 눈에 잘 띄는 주황색 잠수복도 보급됐다.
알몸에서 흰 무명 물옷으로, 다시 검은 고무옷과 주황색 고무옷으로. 해녀의 옷차림에는 시대마다 바다에 적응해온 흔적이 남아 있다.
◇ 둥둥 뜨는 테왁, 전복 떼는 빗창…농기구가 바다 도구로
해녀가 사용하는 물질 도구에도 제주 사람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다 위에 둥둥 뜨는 '테왁'이다.
해녀는 물 위에서 쉴 때 테왁에 몸을 기대고, 가슴을 얹은 채 헤엄쳐 이동한다. 아래에는 잡은 해산물을 넣는 그물주머니인 '망사리'가 달려 있다.
과거에는 잘 여문 박에 구멍을 뚫어 씨를 빼내고 물이 들어가지 않게 막아 테왁을 만들었다. 이후 플라스틱과 스티로폼이 박을 대신했다.
바닷속에서는 잡으려는 해산물에 따라 도구가 달라진다.
바위에 단단히 붙은 전복은 길쭉한 쇠붙이인 '빗창'으로 떼어내고, 암반 틈의 소라·문어·성게는 호미처럼 생긴 '호맹이'로 잡았다. 미역과 톳·모자반 같은 해조류를 채취할 때는 '종개호미'를 썼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물안경도 있었다.
알이 둘인 작은 물안경 '족쉐눈'과 알이 하나인 큰 물안경 '쉐눈'이다.
유리를 주재료로 하고 테두리는 놋쇠나 구리로 만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도구 상당수가 처음부터 바다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해녀들은 밭에서 쓰던 호미와 낫을 바닷속 작업에 맞게 고쳐 썼고 필요한 도구는 대장간에 따로 주문해 만들었다.
밭에서 일하다 물때가 되면 호미를 들고 바다로 향했던 제주해녀의 삶이 물질 도구에 그대로 남은 셈이다.
물옷과 물질 도구 15점은 2008년 제주도 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됐다.
재료와 모양은 달라졌어도 바다에 맞춰 옷과 도구를 만들고 고쳐 쓴 해녀의 지혜는 지금도 이어진다.
19∼20일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일대에서 열리는 제주해녀축제에서는 전통 해녀복을 입고 해녀와 사진을 찍는 '숨비스냅'과 해녀 물질 체험 등 해녀의 삶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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