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지철
| 2021-07-18 09:00:05
[다시! 제주문화](14) 제주신화·무속신앙 질곡의 수난사
제주신화, 그리스·로마 신화 출발점 같아도 성장 과정 달라
"새로운 콘텐츠 개발 중요…원형 중시한 신중한 접근 필요"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제주신화는 제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1만8천 신(神)들의 이야기다.
제주에서는 '신화'를 '본풀이'라고 일컫는데, 신의 근본(本)을 풀어낸다는 의미다.
제주신화는 굿을 주관하는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의 사설 속에 담겨 전해지거나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비전승돼왔다.
제주 사람들은 굿에서 신들의 이야기인 본풀이를 읊어 신을 칭송하고 신을 기쁘게 함으로써 신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주길 바랐다.
굿 속에 제주신화가 담겨 구전된 이유다.
과거 서양에서도 우리나라의 무당과 같은 제사장이 있었고, 신들의 이야기(신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구전되는 과정에서 개인에 의해 덧붙여지기도 하고, 고쳐지기도 하며 신화는 생명력을 이어왔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그리스·로마 신화는 아주 일찍부터 제사장이 아닌 수많은 역사가와 문학가들에 의해 문자로 기록되면서 예술성을 극대화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에 의해 주인공(신)의 성격은 더욱 구체화됐고, 이야기는 더욱 극적으로 재창작되면서 스토리는 탄탄해졌다.
그 결과 그리스·로마 신화는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제주신화는?
과거 제주신화가 학자와 문인들에 의해 기록되는 일은 없었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는 물론 근대 산업화 시기에 이르기까지 무속신앙과 함께 미신(迷信), 음사(淫祀) 등이라 일컬어지며 외면받았다.
제주신화와 그리스·로마 신화는 출발점은 같았지만 성장 과정은 전혀 달랐던 셈이다.
◇ 조선시대, 근대화 거치며 수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국내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에는 다양한 신화가 비교적 고스란히 잘 전해 내려왔다.
'섬'이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중세 문명의 전파가 늦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중앙에서 관리들이 파견돼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면서 문명의 전파와 함께 많은 위기를 겪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국내 다른 지역의 경우 제주보다도 더 일찍 강한 탄압 속에 전국의 기존 신화들이 사라져 도태됐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제주에 불어닥친 대표적인 사례로 조선시대 제주에 부임한 이형상 목사에 의한 탄압을 들 수 있다.
18세기 초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 부임했을 때 미신타파를 목적으로 '당(堂) 오백과 절(卍) 오백'을 파괴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후 근대 들어서도 천주교 포교 과정에서 문명 충돌은 이어졌다.
임금으로부터 '여아대'(如我待, 짐을 대하듯 하라)라는 특별한 증표를 받은 천주교 신부들이 포교를 위해 1899년 제주에 내려오면서부터다.
당시 선교사들은 제주 사람들을 '거칠고 미개하며 배타적이고, 미신에만 열중하는' 야만인이자 선교를 통해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이들은 제주의 전통적인 토착문화, 무속신앙, 관습 등을 모두 배척하고 천주교의 가치 질서 아래 제주 사회를 재편하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神堂)을 파괴하고, 신목(神木)을 베어버리는 등 무리한 포교가 이뤄졌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도 무속신앙에 대한 배척은 마찬가지로 이뤄졌다.
무속신앙은 일제강점기, 4·3사건 등 무수한 역사적 사건 등을 겪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특히, 1970년대를 전후한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일련의 미신타파 운동은 충격적이다.
당시 경제성장에 열을 올리던 박정희 정권은 미신타파란 명분으로 행정력을 동원해 전국 방방곡곡의 장승과 서낭당, 신당 등을 강압적으로 훼손, 철거했다.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는지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생활변화'(남근우)에 따르면 서낭당과 같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전국의 제당(祭堂) 3분의 2 정도가 파괴됐다고 한다.
제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당시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A(83)씨는 "새마을운동 때 변소 개량, 신당 파괴 등으로 제주 고유 풍속이 많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할망당, 해신당, 애기당 등을 없애는 데 동티가 날까 봐 공무원도 철거인력도 무서워했다"며 "그래서 '관명'(官命, 조정 또는 정부에서 내리는 명령)이라고 쓰고 군수 직인이 찍힌 종이를 변소, 신당 등에 붙여서 많이 부셔 없앴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또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1리에 있는 '수산 본향당'(올뤠마루 하로산당)에는 목이 잘린 신상이 있다.
제단에 있는 나무로 된 신상 2기는 각각 남녀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한복을 입혀놓았지만, 현재 신상의 목이 모두 잘려 머리 부분은 훼손된 상태다.
새마을운동 당시 인근 지역 청년들에 의해 훼손된 것이라고 하는데 해당 청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제주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신당 훼손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무속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굿을 벌여야 했다.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이자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예능보유자인 김윤수(75) 심방은 "사라봉 굴속에서 굿을 하기도 했고, 소나무 숲속에 천막을 치고 몰래 굿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당시 만들어진 한국 영화에서도 굿, 무당 등 무속신앙은 사악하고 부도덕한 잡신으로 그려지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면서 사람들에게 일종의 편견과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 '제주신화'의 미래
새마을운동과 급속하게 이뤄진 산업화 속에 우리나라 전통 풍습과 무속신앙은 큰 타격을 받았다.
제주의 굿, 무속신앙 역시 현재 명맥만 이어지고 있을 뿐 과거와 같은 종교적인 영향력을 잃은 지 오래다.
때마다 각 마을에서 이뤄지던 영등굿이나 마을제는 일부 전통이 이어지는 마을로 찾아가거나 영등굿 전수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과거 미신이라 터부시됐던 것들이 이제는 '민속 문화'로서 존중받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지금도 무속신앙, 굿, 신당, 제주신화 등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많다.
연합뉴스가 지난 3월 제주지역 초등학교 4∼6학년 학생 5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제주신화 인식 설문조사 결과 학생들은 제주신화보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더욱 친숙하게 여겼다.
제주신화 상당수가 '굿'을 통해 구전되는 제주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상 초등학생들에게 '굿'을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85.4%가 굿을 '본 적 없다'고 답했고, 84.0%가 제주 입춘굿 축제, 영등신 축제를 본 적 없다고 답했다.
심지어 초등학생 63.9%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제주신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다고 응답했다.
사실상 일상생활 속에서 제주의 세시풍속을 익히는 과정이 단절돼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행히 최근에는 체험학습을 통해 제주신화를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한 어린이용 신화 안내서 등 다양한 서적들이 나오고 있다.
제주신화를 소재로 웹툰이 제작돼 많은 인기를 끌기도 했고, 몇 해 전에는 영화로도 제작돼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관건은 앞으로 제주신화, 사라져가는 제주의 무속신앙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깊이 있는 연구, 새로운 접근 등이 전방위적으로 계속해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허남춘 제주댁 교수는 "제주신화는 현재 너무나 알려지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보다 밖에 것에 관심을 가지며 미국, 유럽을 뒤쫓았다"며 "제주신화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필적할 만한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허 교수는 "제주신화를 바탕으로 다양하고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 보급하고, 교육 현장에서도 당당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화연구가이자 작가 한진오 씨는 제주신화가 아직도 살아있는 종교문화인 점을 고려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을 주문했다.
그는 "제주 고유의 무속, 굿이 가진 종교성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함께 병행돼야 한다"며 "현재 간신히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의 모습을 회복하고 이를 유지할 방안을 모색한 뒤에 콘텐츠 확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작가는 "자칫 (제주신화의) 원형은 사라지고, 변형이 중심이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며 "관광객들이 제주를 단순히 즐기고 소비하는 곳으로 이해하게 하는 콘텐츠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끝)
[ⓒ K-VIBE.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