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배
| 2026-08-14 08:25:00
(전주=연합뉴스) 나보배 기자 = 통유리로 장식한 물속의 궁궐 '수궁주식회사'를 배경으로 격무에 지친 별주부가 용왕 사장의 잔소리를 듣고 있다.
'다섯 시 오십오분 기습 회의 내려온다. 어명이라 부르는데 메신저에 불이 난다. 연차 휴가 쓰려하니 수궁 시국 어렵단다.'
계속 이어지는 별주부의 타령. '남의 간을 구하느라 내 간을 썩였던가'
지난 12일 개막한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인공지능(AI) 판소리 창작프로젝트에 출품된 '배자매'의 '신(新)수궁가 별주부의 퇴사타령' 대목이다.
독특한 건 별주부의 소리뿐만이 아니다.
직장생활을 빗댄 풍자와 해학은 판소리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장단은 전통 판소리보다 신명 나고 대중적인 분위기를 낸다.
이 영상을 제작한 배나경 씨는 "회사원인 동생의 사연을 기반으로 제미나이(Gemini)의 도움을 받아 가사를 쓰고, 수노(Suno, 음악 생성 AI)로 곡을 만들었다"며 "영상은 미드저니(Midjourney, 이미지 생성 AI)에서 만든 이미지를 구글 플로우(Flow, AI 영상 제작 도구)로 가져와 움직임을 넣어 편집했다"고 설명했다.
배 씨는 작품 완성까지 50곡가량을 만들었을 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국악 특유의 깊은 소리를 AI로 재현하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는 "AI로 초반에 작업한 곡들은 트로트 느낌이 났고 민속음악 같은 명령어를 넣고 만든 곡은 지루하게 느껴졌다"며 "고민하다가 '리듬 있게', '앙상블 소리' 같은 명령어를 넣으니 그제야 조금은 원하는 음악을 구현할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삼천동 아이'를 선보인 박건우 씨 역시 배 씨와 같은 고민을 했다.
그 역시 더 깊은 소리를 내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고, 국악 선율에 흥겨운 리듬을 더했다.
박 씨는 "목표치의 70∼80% 정도만 구현한 것 같다"며 "의도한 대로 나오지 않아서 젊은 세대가 따라부르기 쉽도록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삼천동 아이는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서 자란 아이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소리를 하는 내용인데, 전주를 떠난 박 씨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전주를 떠나 대전에서 AI를 배우며 영상 제작자의 길을 걷고 있다.
박 씨는 "AI는 어렵지만 재밌다"며 "예산의 한계로 구현하지 못했던 영상을 더 적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게 AI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전주에서 깨어난 소리' 작품을 출품한 김영훈 씨도 AI 영상 제작에 대한 관심으로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영상 제작 프리랜서인 김 씨는 직접 강의할 정도로 AI에 익숙하다.
김 씨는 "AI가 없으면 영상 제작이 불가능할 정도"라며 "실사 촬영이 어려운 장면은 AI를 활용하고 있다. 이번 영상 역시 축제의 상징을 사용해 전주 고을에서 디지털 소리 바람이 날아드는 모습을 영상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AI는 여러 명이 하던 작업을 혼자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면서도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까지 수정 작업을 거쳐야 하고, 여기에 드는 프로그램 사용료까지 생각하면 아직 마냥 간단한 작업은 아니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판소리 특유의 떠는 목, 고수의 북장단 등을 적극 구현한 작품도 있다.
손채연 씨가 낸 '판'이 그렇다.
그는 아니리(소리꾼이 말하듯 대사를 엮어 가는 부분) 형식을 변주해 전래동화의 해설처럼 영상을 시작했고, 떠는 목을 살려 '별천지로구나'하는 대목을 구상했다.
대금을 전공한 손 씨는 전북대학교 한국음악학과에 재학 중인데 예술융합창작을 융합전공으로 선택해 AI로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배우고 있다.
손 씨는 "'추월이 만경하여', '찌르르' 같이 판소리 어법을 살린 가사를 직접 썼다"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깊은 울림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극적인 비브라토(dramatic vibrato), 강렬하고 감상적인(powerful emotional) 등의 명령어를 넣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 역시 현재의 작품에 완벽히 만족하는 건 아니다.
손 씨는 "국악을 전공한 친구들에게 AI로 만든 음악을 들려주니 '약간 어색하다, 트로트 같다'는 평가가 있었다"며 "국악 전공자지만 제작 연출에도 관심이 있어서 많이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도 국악을 두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다"고 참여 소감을 밝혔다.
이 네 작품에 '춘향가 외전 속지마라, 백년가약'까지 더해 5개 영상이 전주세계소리축제 유튜브 채널에 공개돼있다.
지난달 온라인 투표를 마친 데 이어 '좋아요'와 조회수가 높은 3개 작품을 대상으로 오는 15일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놀이마당에서 현장 투표를 진행한다.
AI판소리 창작프로젝트를 기획한 김정수 축제 집행위원장은 "판소리가 가진 민중적 정서나 풍자가 다소 약한 작품도 있었지만, 웃음이 날 만큼 재미있는 작품도 많았다"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와 놀랐다"고 전문가 심사 결과를 전했다.
그는 "축제 중심에 판소리가 있는 만큼 '낡았다'는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어 현대기술과의 결합을 시도했다"며 "누군가는 AI 창작프로젝트가 전통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통의 범위는 굉장히 넓다. 다 함께 즐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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