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경
| 2023-09-10 08:05:01
작가 정연두가 들려주는 멕시코 이주 한인들의 '백년 여행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 MMCA 현대차 시리즈' 개인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작가 정연두는 지난해 제주도에 머물던 중 북서쪽 월령리 일대의 백련초 자생 군락지를 방문했다. 멕시코에서 자라는 백련초가 구로시오 난류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제주도에 뿌리내렸다는 설화에서 작가는 한국과 멕시코를 오가는 사람과 식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난 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한 정연두 개인전 '백년 여행기'는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뿌리내린 백련초와는 반대로 100여년 전인 1905년 영국 상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지하 1층 서울박스에는 열대 식물 모양의 색색 오브제들이 천장에 매달렸다. 붉은색 씨앗 같은 오브제 밑에 서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웅얼거리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한국에 사는 파라과이, 모로코, 헝가리인 등이 자신들의 언어와 한국어로 그리운 사람, 희망과 꿈 등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다.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당시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들이 겪었을 낯선 감정이 이런 것이었을까를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멕시코 한인들이 일했던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농장을 미니어처로 재현한 설치 작품과 영상으로 구성된 '백년 여행기 - 프롤로그' 작품을 지나면 본격적인 '백년 여행기'가 시작된다.
전시장 양쪽에 마주 보고 놓인 2개의 대형 LED 패널에서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상영된다. 아주 느린 속도로 재생되는 작품 속 마주 보는 두 사람은 가족 관계다. 한인 이주민의 후손들을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등으로 짝지은 '세대 초상' 작품으로, 이주 후 그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부모와 자식 세대에 생겨나는 간극을 이야기한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영상설치작 '백년 여행기'다. 멕시코 이민과 관련된 이야기를 기반으로 작가가 연출한 한국 판소리와 일본 전통음악 기다유, 멕시코 마리아치 공연 영상이 3개 화면에서 펼쳐진다. 1905년 멕시코로 향하던 배에서 태어난 최병덕의 글과 이민 2세인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 할머니의 사연, 멕시코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보영주의 시(詩) 등 멕시코 한인 이주사와 관련된 기록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한편의 무대극을 보는 듯하다.
전시는 12m 높이 벽면 설치 작업 '날의 벽'으로 마무리된다. 작가는 어린 시절 문방구에서 보던 설탕 과자 방식으로 만든 마체테(날이 넓은 벌채용 칼) 모양의 오브제를 벽처럼 쌓아 올렸다. 벽 형태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착안한 것으로, '통곡의 벽'에서 연상되는 '디아스포라'의 의미와 설탕 같은 작물 재배를 위해 이주노동자들이 필요했다는 점을 동시에 짚는 작품이다.
작가는 한인 이주민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다루기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권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겪게 되는 감정, 시간이 지나며 벌어지는 세대 간의 간극, 경계를 넘나들며 이동하는 존재 등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적 장소를 직접 취재하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한 뒤 영상, 설치, 퍼포먼스, 사진 등을 결합해 연극적으로, 때론 환상적으로 연출하는 정연두의 작업 특징을 보여주는 전시다.
정연두 작가는 "어쩌면 작가로서 다루기 힘든 역사적인 무게가 있는 소재지만, 무게감을 덜어내고 예술작품으로서 흥미 있게, 재미있게 봐달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현대자동차 후원으로 매년 국내 중진 작가 한 명(팀)을 선정해 지원하는 연례전 'MMCA 현대차 시리즈'로 진행된다. 내년 2월25일까지. 유료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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