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원
| 2023-03-05 08:03:01
광복 후 심각했던 교사부족…"봉급 50% 올리고 무자격자 채용"
무학여중 교사 20명→2명 급감…처우 문제도 걸림돌
"일제강점기 일본인 중심 교육정책…경험 쌓은 한국인 교원 부족"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일제 강점기 교육 정책이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된 영향으로 광복 직후 남한에서는 교사 부족이 심각한 문제가 됐다.
이에 미군정은 교원 봉급을 대폭 인상했고 자격 미달자를 활용하기도 했지만, 교사 부족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등 혼란이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5일 학계에 따르면 김상훈 서강대 디지털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서울역사편찬원이 발행하는 학술지 '서울과 역사' 113호에 실은 논문에서 이런 내용으로 미군정 교육 정책과 광복 후 교육 상황을 소개했다.
미군정은 일본 패전과 더불어 휴교령이 내려졌던 각급 학교의 재개를 추진했으나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1945년 4월 기준 남한의 중등학교 교사는 한국인이 833명, 일본인이 2천770명으로 일본인이 전체의 약 76%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인이 대거 한반도에서 떠나면서 공백이 생긴 것이다.
광복 당시 한국인 교사의 숫자는 1천225명으로 넉 달 전보다 392명 늘어나기는 했으나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무학여중의 교사는 1945년 8월에는 20명이었는데 석 달 후인 10월에는 10분의 1인 2명뿐이었다.
같은 기간 학생은 수는 325명에서 300명으로 소폭 줄었을 뿐이다.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16명에서 150명으로 급증한 것이다.
논문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중등 교육정책 때문에 중등교육 경험을 축적한 한국인 교직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처우 문제도 교사 확보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1945년 11월 30일 이후 초등학교 교사 289명이 봉급을 받지 못해 사직했다.
미군정 학무국 폴 에레트 부국장이 같은 해 11월 28일 '교사 부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놓은 답변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에레트 부국장은 "긴급책으로 각 지방에서 교원 속성 교육을 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면 다소 자격이 부족해도 교원으로 채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과는 따로 교원과 교수의 월급과 퇴직금을 올리고 그 외 대우를 철저히 개선하여 훌륭한 인재가 교육계로 모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에레트의 발언은 무자격 교사를 채용하고 있음을 시인한 것이며 처우 개선을 통해 교사를 확보하겠다는 구상을 표명한 것이었다.
미군정 문교부는 1946년 4월 교원 2천 명을 단기간에 육성하기 위해 임시 교원 양성소 12개를 개강했다.
또 1947년 8월 9일 자로 공립 초·중등 교원의 봉급을 올리고 대우를 개선했다.
사범학교 출신 8급의 초급은 2천540원, 그 외 초급은 2천500∼2천600원으로 하는 등 기존보다 700∼800원 정도 인상했고 종래 2천100∼2천200원 수준이던 일류학교 교장 봉급은 3천∼3천130원으로 올렸다.
봉급 외에 각 학교 후원회에서 보조하는 금액을 합하면 교원은 평균 5천∼6천원, 교장은 7천원까지 받게 됐다.
결과적으로 기존에 받던 것과 비교하면 약 50% 늘어난 수준이었다고 김 책임연구원은 분석했다.
그 결과 광복 당시 1천225명에 그쳤던 한국인 교사는 1948년도에 9배가 넘는 1만1천260명으로 늘었지만, 교육 수요가 확대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교사 부족 문제가 이어졌다.
1949년 기준 중등교사 1천457명이 부족했고, 중등학교 교사 중 2천 명이 무자격자였다. 초등학교는 교사 4천844명이 부족했고 무자격자는 1만5천200명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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