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인물열전] (25)'아프리카의 체 게바라' 상카라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쿠데타로 권좌 올라 4년 만에 피살…제국주의 비판, 토지 재분배 등 급진 개혁

박성진

| 2026-06-20 08:00:05

▲ 토마 상카라 전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2025년 5월 토마 상카라 영묘 제막식에 참석한 부르키나파소 시민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지도 [제작 양진규]
▲ 블레즈 콩파오레 전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아프리카인물열전] (25)'아프리카의 체 게바라' 상카라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쿠데타로 권좌 올라 4년 만에 피살…제국주의 비판, 토지 재분배 등 급진 개혁

(서울=연합뉴스) 박성진 기자 =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을 지낸 토마 상카라(1949∼1987)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불린다.

1959년 쿠바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혁명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와 마찬가지로, 쿠데타로 1983년 권좌에 오른 이후 서방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반부패, 자립경제를 추구하는 급진 개혁을 단행했다. 자국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존경받고 있다.

상카라는 1949년 부르키나파소 중부 야코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식민 지배하에서 아버지가 식민지인으로서는 드물게 공무원인 헌병으로 근무한 덕분에 상카라는 어린 시절 상대적으로 유복하게 지냈다.

부모는 그가 가톨릭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상카라는 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70년 마다가스카르의 사관학교로 연수를 떠나 좌익 서적을 탐독했다. 그는 자국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사회주의에 주목했다.

또 이때 농업과 역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나중에 지도자로서 필요한 지식을 쌓았다.

상카라는 1974년 주변국인 말리와 국경 분쟁에서 공을 세우면서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이후 군정에서 각료와 총리를 지낸 뒤 33세이던 1983년 친구 블레즈 콩파오레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됐다.

부르키나파소는 1960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뒤 극심한 가난과 혼란을 겪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범(凡)아프리카주의와 반제국주의 운동의 상징인 상카라는 권력을 잡은 뒤 부정부패와 식민지 잔재 일소를 내세웠다. 재임 4년간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봉건지주의 땅을 몰수해 농부들에게 재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또 학교와 보건소, 저수지 등 사회 기반 시설 건설에도 힘을 썼다.

농업 생산력 향상으로 집권 4년 만에 국내 기아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하며 국제사회의 찬사를 받았다.

소아마비, 황열, 홍역 등 백신 접종 프로그램을 추진해 공중보건도 크게 개선됐다.

여권 신장에도 관심을 둬서 여성할례와 강제 결혼, 일부다처제를 불법화하는 한편 내각 고위직에도 여성을 임명했다.

환경 면에서는 사헬 지역(사하라 사막 이남 반건조 지대)의 사막화를 막고자 취임 후 1년 동안에만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고위 공직사회의 특권 행태도 고쳤다.

대통령과 장관 관용차를 비싼 메르세데스-벤츠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프랑스 르노로 바꿨으며, 고위 관료들은 운전기사를 두지 못하게 했다.

그는 당시 사치품인 에어컨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면서 대통령 집무실에서도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취임 1주년을 맞아 1984년 프랑스 식민 지배 잔재가 남아있는 국명 '오트 볼타'를 '부르키나파소'로 바꿨다. 부르키나파소는 현지어로 '정의로운(정직한) 사람들'을 뜻한다.

상카라는 아프리카의 자립을 목표로 한 혁명적인 개혁 정책으로 아프리카 서민의 우상이 됐다.

반면 국내 기득권층과 부르키나파소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지닌 식민종주국인 프랑스와 멀어졌다.

상카라의 외교 정책은 특히 반제국주의에 중점을 뒀다.

경제 자립에 힘을 쏟는 한편 국제통화기금(IMF)의 긴축 요구나 차관을 거부하는 등 서방 국제금융기관과 거리를 뒀다.

상카라는 외국 원조를 꺼리며 반서방 자립 경제를 추진한 데 대해 "당신을 먹여 살리는 자가 당신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개혁정책은 자국에 혁명이 일어날 것을 걱정한 주변국 독재자들과 아프리카 대륙에 사회주의 개혁을 퍼뜨릴 것을 우려한 서방에 위협적으로 비쳤다. 결국 그는 친구이자 혁명 동지인 콩파오레의 쿠데타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상카라는 대통령 재임 4년 만인 1987년 10월 15일 콩파오레가 주도한 쿠데타 와중에 피살됐다.

그는 쿠데타 세력에 살해될 때 가슴에 최소 7발의 총탄을 맞은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콩파오레는 27년간 철권통치를 이어가며 상카라의 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콩파오레 치하에서 상카라 피살 재판은 열리지 못했다.

콩파오레는 영구집권 개헌을 시도하다가 2014년 민중 시위로 쫓겨난 뒤 코트디부아르로 도주해 망명 생활을 해왔다.

그는 2022년 궐석 재판에서 상카라 살해 공모 등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건 발생 약 35년 만의 단죄다.

부르키나파소 정부는 2023년 상카라를 '국가 영웅'으로 공식 선포하며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상카라는 지난해 수도 와가두구의 새 무덤에 재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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