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재
| 2026-03-07 08:00:08
[길따라] 서방 vs 페르시아, 2천년의 대결
(서울=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세계 각지를 여행하다 보면 역사책 속 인물들을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치게 된다.
튀르키예 고르디온의 작은 박물관, 아나톨리아의 평야, 지중해 연안의 오래된 도시들에서 알렉선더 대왕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방과 페르시아의 충돌이 먼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라는 사실도 실감하게 된다.
그리스 테살로니키 항구에서 마주친 알렉산더 동상도 인상적이었다.
긴 장창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젊은 왕의 모습은 동방 세계를 정복한 군주의 기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창은 마케도니아 군대의 상징이었던 '사리사'로, 알렉산더가 활용한 팔랑크스 전술의 핵심 무기였다.
알렉산더 대왕을 이야기할 때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이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페르시아 제국이 서방 세계와 맞붙은 대표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서방 문명의 기원을 흔히 그리스와 로마에서 찾는다.
그리스 세계를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묶어낸 인물이 마케도니아의 젊은 군주 알렉산더였다.
그는 그리스를 통합한 뒤 기원전 334년 소아시아로 진군하며 페르시아 제국과 전면전에 들어갔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지금의 이란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소아시아를 아우르는 초대형 제국이었다.
이란이 오늘날까지 스스로를 페르시아 문명의 계승자로 인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이란은 1935년까지 국제적으로도 '페르시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기자는 튀르키예 앙카라 인근 고르디온 박물관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모자이크를 본 적이 있다.
이곳은 전설 속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있던 곳이다.
알렉산더가 칼로 매듭을 끊으며 아시아 정복의 출발을 알린 장소다.
아나톨리아 한가운데 작은 박물관에서 그의 흔적을 마주하자 이 젊은 왕의 행군이 얼마나 넓은 세계로 이어졌는지 실감이 났다.
알렉산더가 맞선 상대는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3세였다.
병력 규모에서는 페르시아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전쟁의 결과는 달랐다.
알렉산더는 사리사로 무장한 팔랑크스 보병을 중심에 두고 기병의 기동력을 결합하는 전술을 택했다.
보병이 정면에서 적을 묶는 사이 기병이 측면과 후방을 돌파하는 방식이었다.
이 전략은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대군을 격파했고, 이어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시 승리하며 사실상 페르시아 제국의 운명을 끝냈다.
당시 다리우스 3세는 20만 대군이었으나 알렉산더의 병력은 4만7천여명 정도에 불과했다.
두 전투는 이후 군사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전으로 기록됐고, 한니발과 스키피오 같은 장군들에게도 큰 영향을 남겼다.
흥미로운 점은 서방 세계와 페르시아 사이의 충돌이 역사 속에서 반복돼 왔다는 사실이다.
고대에는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맞섰고, 이후 로마와 사산 페르시아 제국이 수 세기 동안 대립했다.
오늘날 미국과 이란 사이의 갈등 역시 단순한 국가 간 분쟁을 넘어 서방 세계와 페르시아 문명 사이의 긴 역사적 긴장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물론 현대 국제정치는 훨씬 복잡하지만, 페르시아라는 이름이 수천 년 동안 중동의 정치와 문화에서 차지해온 무게를 생각하면 현재의 갈등 역시 긴 역사 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과 다리우스 3세의 전쟁은 서방 세계가 동방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거대한 충돌이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서방과 이란 사이의 긴장이 세계 정치의 중요한 축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 오래된 역사와 기억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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