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창
| 2026-01-21 08:01:00
[여행honey] 아직도 '공원'인 장충단공원
아픈 역사 담긴 장충단비…세종 때 만든 수표교도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서울 동대문에서 남산을 향해 가는 길목.
꼿꼿한 소나무가 늘 푸르고, 느티나무·산사나무·층층나무·은행나무·복자기가 철 따라 옷을 갈아입는 장충단공원은 짧은 산책만으로도 기쁨과 위로를 주는 공간이다.
하지만 공원의 역사를 알고도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만 이 공간을 걸을 수 있을까.
◇ 추모 공간이 위락 공간으로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올라가면 바로 장충단공원 입구다. 긴 진입로도 표지석도 없는,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작은 공원.
왼쪽으로 키 큰 소나무 밑에 '장충정'이라는 정자가 무심하게 서 있다.
몇걸음 안 가 장충단비가 나타났다. 반듯한 사각 받침돌 위로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진 비에는 장충단(奬忠壇)이라는 글자가 전서체로 씌워져 있다.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쓴 글씨라고 한다.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비문이 있는데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곳은 조선 영조 중엽 이래 한양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이다.
이 자리에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일본인과 싸우다 순국한 홍계훈, 이경직 등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895년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인 장충단을 지었다.
제사는 매년 봄·가을에 지냈다.
1910년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한 뒤 장충단을 없애고 이곳에 공원을 만들었다. 지금의 '장충단공원'이라는 이름은 그때 지어진 것이다.
제단을 없애고 벚나무를 잔뜩 심었다. 순국선열 추모의 공간이 위락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1930년대 일제는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 '박문사'를 이곳에 설치했다.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다.
경희궁의 흥화문을 뜯어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위엄과 조선 정치의 상징성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방식으로, 장충단의 국가적 의미를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문화숨결 김영해 해설사는 "장충단은 우리나라 최초 현충원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는데 일제가 이를 이토 히로부미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만들었다"며 "지금의 영빈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일부가 당시 박문사 계단이었다"고 말했다.
일제는 장충단공원에 일본의 대표적 사업가인 시부자와 에이치의 송덕비와 상해사변 때 전사한 일본 결사대를 기리기 위한 동상을 건립했다.
1940년대에는 이곳에서 일본정신박람회를 열어 황국신민화 작업의 공간으로도 활용했다.
◇ 아직도 장충단은 공원
장충단비를 지나 좌우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섰다.
장충단의 역사 기록물을 전시한 '기억의 공간'이 있고 조금 더 가니 191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 유림이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했던 일을 기념하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가 있다.
파리장서비 주변엔 유림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들이 둘러섰다.
지척에 이준 열사 동상도 있다. 모두 해방 이후 박문사를 철거하고 장충단비를 복원한 뒤 하나둘씩 세워진 기념물들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 공간으로서 장충단의 고유한 성격을 원상회복하는 방안이 장충단공원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만들자는 안과 함께 논의됐다.
그러나, 한국전쟁 등 정치정세의 변화에 따라 공원은 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정치 유세가 이뤄지는 공간으로 바뀌었을 뿐 결국 정체성 회복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장충단은 여전히 장충단공원이다. 장충단의 원래 의미를 되새긴다면, 공원은 스스로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운명이다.
공원의 오른쪽으로 절반을 돌아 끝까지 가면 한옥 카페가 나온다. 한겨울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카페 앞 감나무에는 아직도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카페에 젊은 일본 여성들이 많아 깜짝 놀랐다. 일본인들에게 이곳이 주요 관광지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 수표교와 안개
카페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공원의 나머지 반을 걷는다.
아늑한 곡선으로 이어진 좁은 공원길 주변엔 백철쭉, 맥문동, 벌개미취가 납작 엎드려 겨울을 견뎌내고, 그 위로 붉은 산수유 열매가 꽃인 양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얼마 안 가 수표교가 나타났다. 이 공원에서 딱 하나만 보고 오라면 단연 수표교일 것이다.
조선 세종 2년(1420)에 청계천에 세워진 수표교는 1959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조선 초 청계천 위에 다리 7개를 놓았는데 현존하는 건 수표교뿐이다.
수표교는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해 홍수에 대비하던 다리였다.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원래 자리에 다시 놓으려 했지만,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겨지지 못하고 결국 이곳에 안착했다.
다리는 양쪽으로 각각 11개의 엄지기둥이 솟아 있고 6각형의 돌난대가 빈틈없이 꿰맞춰져 있다.
손끝을 기둥에 가져가니 차갑고 묵직한 화강암의 질감이 전해진다. 시간의 흔적. 닳아 반질반질해진 바닥을 걸었다.
다리 밑 실개천은 물이 바짝 말라 있다. 김영해 해설사는 이 물이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라고 말했다.
가수 배호의 1967년 트로트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라는 제목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한다.
이곳 지형상 실제로 안개 낀 날이 많았을 것이다. 배호의 노래 2절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12월 공원의 작은 숲. 산책하다가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수많은 사연에 귀 기울이면, 공원의 숲길은 어느새 가슴으로 공명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 참고 자료
1. 일제강점기 장충단공원 변화에 관한 시계열적 연구(김해경·최현임, 2013)
2. 제1공화국 시기 장충단공원의 정체성의 변형 과정(김수자, 2015)
3. 장충단·박문사의 사적 변천과 그 의미(윤기엽, 2016)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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